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이 한 시절 유행한 일이 있었다. 아예 문학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포하는 발언이 심심치 않게 문예지와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은 위기를 넘어, 죽음을 넘어 오늘 이 시간에도 당당하게 현존하고 있다. 아니 현존이 아니다. 문학은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터미네이터처럼 더 강한 생명력을 성취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있다. 바로 신흥 문예지의 연이은 창간이다. 『문학판』, 『문학인』이 창간되었으며 이어 『문학수첩』이 창간되었다. 더 놀라운 일은 시전문 문예지의 창간이니 『시평』, 『시작』, 『시경』이 그 예들이다. 어디 이뿐인가? 『21세기문학』은 『파라』라는 이름으로 재창간되기도 했으며 『문학과경계』는 새로운 편집위원을 충원해 혁신호를 제작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바야흐로 문예지 백가쟁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로운 문예지의 창간이 반드시 우리 문학의 질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절대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생 문예지들의 창간 의의를 굳이 폄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후발 문예지들은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실천문학』, 『작가세계』, 『세계의 문학』, 『문학동네』, 『동서문학』과 같은 선발 문예지들의 편집 관행을 강하게 반성케 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으며 현역 작가들에게는 더 많은 작품창작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고 문예지끼리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기에 신생 문예지의 출간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긍정적 의의는 긍정적 의의대로 인정하되 우려는 우려대로 밝히면서 신생 문예지들의 활기찬 분발을 촉구하는 비판은 얼마든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신생 문예지들의 출간 동기나 그 과정은 동일하지 않겠지만 그 역할과 소임은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바로 ‘21세기 우리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역할과 소임’이다. 지난 한 시대를 풍미한 문예지들과는 다른 문학의 길을 열어가고 그리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과제를 이 신생 문예지들은 온전히 수락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신생 문예지들은 이 과제를 치열하게 감당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으니 이 신생 문예지들의 문학적 이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문학인』과 『문학판』이 어떻게 다르며 『문학수첩』, 『문학과경계』가 어떻게 다른가를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요컨대 문예지의 내면을 관통하는 혹은 문예지를 장기지속적으로 버티게 하는 문학적 이념이 잘 안 보인다는 얘기다.
문예지를 지속시키는 결정적인 힘이 출판사의 자본력에 달려 있는 건 아니다. 출판사의 자본력보다 더 중요한 건 문예지의 문학적 이념이다. 문학적 이념이 부재하거나 모호한 문예지의 생명은 길 수 없다. 설령 길다 하더라도 좀 과격하게 비유하자면 ‘죽은 목숨’이다. 우리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데 긴요한 문학적 이념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를 실제로 편집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생 문예지에게서 기존 문예지들이 구축한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우리 문학의 새로운 영역과 경지를 창출하려는 문학적 이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점이 신생 문예지의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점 중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창간된 문예지들은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실천문학』처럼 처음부터 동인지 형식으로 출발하지 않은 까닭에 문학적 이념이 부재하거나 모호할 수 있다. 그러나 발행인은 발행인대로 편집위원들은 편집위원대로 어떤 문학적 이념을 추구하며 문예지를 발행할까 고민하고 고민해야 한다. 물론 단순하고 소박한 문학적 이념으로 문예지의 정체성을 고정적으로 확립할 이유는 없다. 소박한 문학적 이념이 오히려 문예지의 역동성을 제어할 수 있기에 시대와 독자들의 변화된 요구와 감수성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전위의 눈으로 삶의 현실과 미래를 내다보는 문학적 이념의 기획은 이 신생 문예지들에 특히 요구된다.
신생 문예지들이 창간사에서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편집 방향을 말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문학인』은 “어떤 주의나 주장을 표방하거나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학적 이념의 간극과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문학적 영역’을 구축”하면서 ‘진정한 문학적 소통’을 이루겠노라는 편집 방향을 대외에 선포했으며 『문학수첩』은 “문학과 문화, 우리는 이 개념 아래 다매체 시대, 다문화 시대에 걸맞은 우리 문학의 본령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떻게 타문화 장르에 연계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 말들의 의미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말의 표현은 화려하지만 말의 의미는 구체성을 띠지 않는다. 간극과 경계를 넘어선다거나 우리 문학의 본령을 보여준다는 표현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그 의미는 명약관화하지 않다. 그렇기에 이 말의 의미를 구체화는 편집 작업은 이 신생 문예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실제로 발간된 문예지의 내용물들은 도전적인 창간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준다. 익히 알려진 중견 평론가들의 인터뷰와 작가들의 소설로 장식된 신생 문예지들,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없이 상식 수준에 머물러 버린 특집으로 구성된 신생 문예지들은 사실 신생 문예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생 문예지들이 좀더 과감해지기를 바란다. 논쟁적이기를 바란다. 도전적이기를 바란다. 실험적이기를 바라며 진정 혁신적이기를 바란다. 요컨대 신생 문예지들은 좀더 과감한 태도로 기왕의 계간지들이 구축한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득의의 노력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신생 문예지들이 신생 문예지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왜 신생 문예지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걸까? 나만의 오해일까?
- 양진오
- 글 / 양진오_평론가,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1965년생. 평론집 『한국소설의 논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