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찾아서
다시 조선작의 전성 시대를 기대하며

  • 작가를 찾아서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다시 조선작의 전성 시대를 기대하며

   
때로는 터무니없이 쉽게 잊혀지는 작가, 혹은 작품이 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문학 쪽에도 저주받은 작가, 저주받은 작품이 있다. 대단히 밀도 있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음에도 몇몇 전문가나 마니아에게만 추앙 받는 작가나 작품. 한국문학 경우에도 그런 작가들이 적지 않으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조선작이다.

조선작은 그 유명한 「영자의 전성시대」를 쓴 작가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작가 조선작으로 하여금 한 시대를 풍미하도록 한 작품이자 동시에 그를 터무니없이 쉽게 잊혀지게 한 소설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묘하게 선정적인 이미지로 착색되어 영화화된다. 그리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작의 소설 세계 전반이 왜곡된 형태로 독자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한 시발점이 된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원래 소설의 품격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상태로 각색되며, 이것이 결국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가 지닌 문제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불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후 파란만장한 70~80년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야말로 ‘~자들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이것이 뭇사람들의 풍자와 야유의 대상이 되면서, 「영자의 전성시대」는 사람들 입에서는 끊임없이 회자되되 꼭 그만큼 소설의 가치는 묻혀버리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너무나 혹독한 유명세를 치렀다고나 할까.

물론 「영자의 전성시대」가 그 소설에 깃든 문학적 진정성에 비해 지나치게 평가를 받지 못한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가 되고 만 이유가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나름대로의 문학적인 요인 또한 개입되어 있다. 조선작의 소설이 소수만의 전문가들이 거듭거듭 읽고 탄성을 발하는 작품으로 좁혀진 문학적 이유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포함한 조선작의 소설이 아주 묘한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사총」 「시사회」 「영자의 전성시대」 등 조선작의 소설은 황석영, 이문구, 홍성원, 조세희 등으로 대표되는 소설적 경향과 최인호, 조해일, 박범신 등으로 계열화가 가능한 부류의 어느 중간쯤에 있다. 즉 조선작의 소설은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의 불행을 그리되 조선작만의 고유한 문체와 시선을 유지했으며, 조선작 특유의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기존의 보편성으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하는 하위주체들을 간절하게 소설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여, 조선작의 소설은 창녀, 목욕탕 때밀이, 버스여차장, 공장노동자, 월남 파병 군인, 개도둑, 식모 등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주체들을 그야말로 생동감 있는 인간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근대화, 산업화로 표상되는 1970년대식 보편성을 여지없이 해체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은 후에 『어둠의 자식들』 등으로 이어지는 바, 이야말로 1970년대 문학사에 조선작이 남겨 놓은 그만의 선명한 흔적이자 선구적인 자취라 할 만하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조선작의 소설은 기존의 영토나 위계질서를 여지없이 해체시키고는 그것을 다른 위계질서로 재영토화하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탈영토적 글쓰기는 조선작과 동시의 다른 작가들을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조선작은 황석영 등의 경우처럼 민중적 생동력을 위계의 중심에 세워놓고 민중 중심의 역사상을 재구성하거나 아니면 최인호 등처럼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직접성을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조선작 소설은 「영자의 전성시대」 등에서 볼 수 있듯 다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하위주체들의 단순하고 순박한 정서와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비근대적인 가치를 통해 근대적인 규율들을 여지없이 해체한다. 조선작의 소설은 월남에서 돌아온 파병 군인의 시선을 통해 현대 도회의 일상사를 끊임없이 전쟁의 잔혹한 풍경과 유비시키거나, 아니면 타자와의 의리를 절대적인 덕목으로 섬기는 순진한 인물을 통해 근대 특유의 이윤추구라는 행위라든가 그것을 형식화한 근대적 제도들이 사실은 하나같이 자기만을 배려하는 비인간적이며 작위적인 고안물임을 눈밝게 짚어낸다. 그리고 조선작의 소설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순진성의 아이러니를 통해 세계 전체가 뒤집혀 있음을 그려내고는 아무런 새로운 가치도 지향점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작 특유의 이론(혹은 개념)에의 저항의지가 조선작 소설을 한껏 풍부하게 한 원천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조선작 소설을 소설사의 흐름에서 괄호 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조선작 소설 자체가 개념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개념들을 통해 재구성되기 마련인 문학사 안에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간 조선작 소설의 독특한 세계, 혹은 그것을 가능케 한 치열한 탈영토화 의지는 조선작의 전성 시대(?) 이후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작 특유의 탈영토화 의지란 대단히 낯선 물건이어서 이후에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대의 우리 문학 전반이 민중이라는 강력한 개념, 혹은 재영토화 원리에 의해 구성되었음은 잘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조선작 식의 비의지적인 에너지는 자리할 틈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이러한 모더니티로부터 폐기처분된 인물들에 대한 관심은 정작 조선작 자신도 유지하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벌어진다. 조선작은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 일제강점기 시대의 최서해가 그러했듯, 소시민적 일상세계에 대한 풍자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물론 이 시기의 작품에도 「고압선」이나 『퇴계로의 숲』 등의 명편이 없는 것은 아니나, 소시민적 생활에 대한 자기풍자와 세태풍자에 치우침으로써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보였던 내밀한 밀도를 맛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렇게 「영자의 전성시대」가 보여주었던 모더니티로부터 업젝션된 존재들의 절망과 희망, 그리고 그들의 비의지적 저항과 그것이 지니는 강렬함은 다시 경험하기 힘들게 되고 말았다.

최근 민중을 중심으로 한 80년대식의 거대담론이 70~80년대식 개발논리에 억눌려 있던 민중적 삶의 고통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또다른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역기능도 수행했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또 그와 동시에 일방적인 개념에 의해 질서화되어 왔던 문학도 이제 문학 내적인 논리에 의해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즉 어떤 보편적인 규범성에 직접적으로 부응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작품은 이미 예술작품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는 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때문인가. 문득, 「영자의 전성시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선작이, 그리고 그의 소설의 창녀들이, 때밀이들이 그립다. 아니,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순간 『퇴계로의 숲』 이후로 거의 끊어진 조선작의 소설 세계가 다시 「영자의 전성시대」의 세계로 이어져 우리를 놀라게 할 것 같은. 마치 황석영, 홍성원, 김원일, 박범신, 최인호들이 우리 곁에서 건재하거나, 이제는 끝인가 하고 생각하는 다시 돌아와 우리를 놀라게 했듯이 말이다.



류보선
글 / 류보선_평론가, 군산대 국문과 교수. 1962년생. 평론집 『경이로운 차이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