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 리뷰
정지용 탄생 1백주년을 빛낸 의미있는 작업 - 日譯 『鄭芝溶詩選集 정지용시선집』

  • 번역서 리뷰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정지용 탄생 1백주년을 빛낸 의미있는 작업 - 日譯 『鄭芝溶詩選集 정지용시선집』

 
  정지용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2002년에 그의 첫 일본어 번역시집이 나왔다. 한일 간의 출판물 무역역조를 들먹이지 않아도 한국문학작품의 일어 번역/소개가 한국에 소개된 일본문학작품에 비해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현실을 인식할 때, “끈질긴 삶 속에 서린 한(恨)의 정서를 우리의 목소리로 발성한 최초의 현대시인, 우리 언어의 깊은 광맥을 찾아 그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 구사로 대상의 선연한 이미지를 형성화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보인”(김학동, 「작품해설」,『정지용 전집 1』, 민음사, 2003판) 정지용의 시를 일본에 번역/소개한 일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번역하신 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노고’라고 했지만 이 말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한국어 그대로 파악하려고 해도 어려운 지용 시를 ‘원작에 대한 반역’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제2의 창조’ 라고 불리기도 하는 번역으로 상대방 나라의 문학적 문맥에 들어맞으면서 동시에 원시의 낯설기로 충격을 줄 수 있게 번역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역자들의 노고는 높이 평가된다.

  필자는 시에는 문외한인 일본 근대문학 전공자다. 따라서 번역시집을 읽으면서 궁금하게 느껴졌던 점들을 하나의 단순한 독자로서 몇 가지 물어보았으면 한다.

  먼저 궁금했던 것은 왜 지용시의 3단계라고 할「長壽山」부터 번역․수록했을까 하는 점이다. 역자들 나름의 선택기준이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1920년대의 “선명한 이미지를 前景化한” (김용직,「순수시의 자기극복 - 정지용 시, 그 읽기」, 번역시집 수록) 이미지즘의 시기부터 수록했더라면 좀더 쉽게 지용의 시적 변천사를 쫓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초기 지용 시에는 독자적인 이미지즘의 풍모가 있는데 후기의 원숙기의 산문시를 앞에 수록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독자가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는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초기의 대표작이자 한국인의 국민적 애창가로 자리 잡은 「향수」(1927)는 86쪽에 실려 있으며「까페 쁘랑스」(1926)는 94쪽에 실려 있는데, 그 편집기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독자에게 좀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적어도 각 시에 창작 연도를 넣어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까페 프랑스」를 읽으면서 일체의 비속성에 대한 반항을 가지고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예술을 구가한 1912경까지 이어지던 일본의 청년 예술가들의 모임인 ‘팬(PAN)의 모임’과 거기 분출되었던 신선한 서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청춘”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팬의 모임’의 핵심적 존재였던 ‘언어의 마술사’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추억은 목덜미의 빨간 반디의

    오후의 미심쩍은 감촉같은

    두둥실 푸른 기를 띤

    빛나는 것 같지도 않은 빛?                

      - 『추억』 序詩 첫 구절(번역 필자) 


  “청춘”의 분출에 휩싸였던 정지용이 곧바로 한국적 서정과 향토색 짙은 시어가 충만한 「향수」의 세계로 나간 것은 우리 근대시를 위해서는 하나의 기적이라 느껴진다. 지용이 그려낸 그런 변천의 궤적을 번역시를 통해 일본 독자들에게 확인시킬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얘기이다.

  또한 지용이 직접 일어로 쓴 「까페 프랑스」와 한국어판 「까페 프랑스」는 전혀 다른데(이는 「바다」1, 2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1, 2는 김학동 교수가 임의적으로 붙인 넘버링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독자가 지용이 직접 1, 2라는 넘버링을 한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번역시선집에 작가가 직접 일어로 쓴 작품을 수록해서 일본인 독자들이 한국어로 쓴 같은 제목의 시(번역)와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욕심도 있다.

  여기에서 앞에 실린 몇 개의 번역시에 한정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수록된 「장수산 1」을 보자. 원시의 ‘伐木丁丁 이랬거니’가 번역시에서는 ‘伐木하는 나무소리’로 되어 있어 원시에는 없는 ‘나무소리’가 첨가되어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나 꼭 ‘나무소리’를 넣어야 했을까 하는 회의가 다소 든다.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는 ‘깊은 산의 고요함이 오히려 뼈에 사무치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かえって骨にしみるけれど’ 부분을 ‘骨にしみて’(뼈에 사무쳐/스며들어)로 간결하게 하는 것이 이 시의 절제된 시어의 명증성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부분은 ‘달도 만월에 가깝고 하얗다는 것은……’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白いとは’(하얗다는 것은)을 ‘白いのは’(하얀 것은) 정도로 좀더 일상어에 가깝게 번역해 주었으면 독자가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라는 부분은 ‘맑디맑은 노인이 남긴 내음을 주울까’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淸らかに老いた男の’(깨끗이 늙은 사나이의)라고 직역해 주는 것이 원시의 뜻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름’은 ‘슬픔, 애상(哀しみ)’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근심 걱정과 슬픔, 애상은 다소 뉘앙스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있다. 마지막의 ‘장수산속 겨울 한밤내―’ 는 ‘겨울’이 생략되어 ‘장수산 한밤내에―’로 번역되어 있다. 겨울과 달밤이 공존함으로써 벌목정정이 수채화처럼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역시 ‘겨울’은 넣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장수산 2」를 보자. ‘어름이 굳이 얼어 드딤돌이 믿음즉 하이’ 부분은 ‘얼음은 단단하고 디딤돌이 의지가 된다’로 번역되어 있다. 어름과 디딤돌은 분리시키기보다는 일체화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의지가 된다’(賴りである)는 ‘믿음직하다’를 나타내는 ‘賴もしい’로 직역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백록담」을 보자. ‘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는 ‘…… 키가 점점 줄어든다’로 번역되어 있다.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한국적 표현이 아닌 ‘소모’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낯설기에 의한 신선함을 환기시키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줄어든다’는 용어로 바꿈으로서 다소 평범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허리가 슬어지고’라는 부분은 ‘허리를 구부리고’(腰を屈めて)로 번역되어 있다. ‘스러지고’는 ‘차츰 사라지고’를 나타내는 ‘消え去り’정도로 번역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부분은 ‘나아가 얼굴만 기울이고 보고 있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보고 있다’ 보다는 ‘들여다 보고 있다/엿보고 있다’(のぞいている)로 표현해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상 간단히 역시집 앞부분에 수록된 번역시 몇 편만을 살펴보았다. 전술했듯이 필자는 일본근대문학 전공자로서 시에는 문외한이다. 서평을 부탁한 분도 일본어 번역이 일본문학의 문맥에서 이해받을 수 있을까를 검토해 달라고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거론한 부분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인 문외한이 눈에 띤 부분을 몇몇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둔다. 다시 말해 위의 언급은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단상(斷想)에 지나지 않는다. 번역이 자국문학에 낯선 감정과 표현의 유입에 의한 낯설기를 환기시키고 동시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보편적인 문학적 지평을 개시하는 것이라면 지용 시의 번역 작업은 충분히 그 임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나라의 문학적 관습에 어디까지 다가갈 것인가는 번역가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 중 하나일 것이다. 일본에서 원시보다 뛰어나다고 평해지고 있는 우에다 빈(上田敏)의 번역시 베를레느의 「Chanson d'automne」(제목을 ‘落葉’으로 번역)과 똑같은 시를 「가을의 노래」로 번역한 김억의 시는 그런 뜻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우에다 빈은 이 시를 일본의 문학 전통에 맞추어 대담하게 의역하고 있는데, 역자가 원시를 지나치게 일본화시킴으로써 당시로는 가장 새로운 경향과 기법을 구사한 이 시가 일본 고유의 적막한 시적 이미지를 지니게 됨으로써 원시가 지니는 근대적인 퇴폐감의 전달에 실패하였다고 논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시가 명 번역시로 일본인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비해 김억의 번역시는 한국의 전통적 율격을 계승하고 있지 않고 동시에 원시의 음악적 효과의 재생이 안 나타나 있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원시에 충실하여 당시의 데카당스한 분위기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독자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가 하는 점만 본다면 우에다 빈의 「낙엽」이 훨씬 성공적하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원시를 충실하게 옮길 것인가, 어느 정도는 의역할 것인가 하는 것은 늘 번역가에게 현존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 번역시집은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 몫을 다한 역시집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 『鄭芝溶詩選集』은 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2002년 일본의 가신샤(花神社)에서 출간되었다.
김춘미
글 / 김춘미_번역가, 고려대 일문과 교수. 1943년생. 역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물의 가족』 『히로시마노트』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