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 스페인어譯 『Pais de neblinas 김광규 시선집』

  • 번역후기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 스페인어譯 『Pais de neblinas 김광규 시선집』

   김광규 시인의 시를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 대학에 들어와서 였을 게다. 내가 대학에 들어 온 80년대 초반은 격정과 분노의 언어가 예리하게 날을 벼리던 시기였고, 나는 그 격정의 언어들이 갖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혹은 그것들이 풍기던 불길한 징후들을 예감하면서 못내 위태로웠다. 무리를 이루어 은밀하게 나누던 불온한 언어들, 알 수 없는 적의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우며 나섰던 거리들, 그리고 도림천 변의 그 숱한 취한 밤들 사이로 우리는 조급하게도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 꿈은 삶에 잔뜩 생채기를 남긴 채 사라졌다. 결국 우리 중 몇몇은 징역을 갔고, 나는 영악스럽게 그 현실에서 도피했다. 이렇게 통과제의를 치르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었고, 그 때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1960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들의 후일담으로 읽혀질 수 있는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직접 경험한 혁명과 18년이 지난 후에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되돌아본 과거 사이의 간극과, 기성의 일상화된 삶이 주는 쓸쓸함을 지적인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성세대에 대한 일정한 혐오, 나른한 지식인 풍의 정서에 대한 논리적 거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왠일인지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친연성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 시에 나타나 있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 아니 우리 모습일 지도 모른다는 연민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김광규의 시를 처음 읽은 지 어느 덧 18년이 지난 후, 또 다른 김광규가 되어 있다. 김광규의 시를 좋아했다는 작은 인연으로 그의 시를 스페인어로 옮기면서 내내 나는 내 삶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시 속에서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면서, 또 ‘한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겨 놓고 있을 때, 나 역시도 사전 페이지를 뒤적여가며 또다른 현실의 늪에 갇혀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스물 무렵 나에게 위안이 되던 시가, 이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물으면서 내 삶을 무겁게 부하한 것이다. 해서 난 그의 시에 누가 되고 있다는 자책과,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쯤은 삶의 지혜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게 하는 나의 무디어진 염치와 위악스러움으로 인해 내내 부끄러웠다.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공역자로 참여한 토비아스(Tobias) 씨와 후아나(Juana) 씨가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두 분은 중남미에서 태어났거나, 중남미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부부로 현재 독일에서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역시인들과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은 아무래도 공역자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감각,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적 리듬감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번역자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번역을 요구하게 되는데 반해, 공역자들은 아무래도 약간의 변화를 무릅쓰고라도 시적 리듬감을 살리고자 했다. 이 양자간에서 균형감 있는 태도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번역할 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스페인어권에 이해가 가능한 보다 의미 전달이 쉬운 시들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약간의 무리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대표시들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 되었다. 또한 스페인어권의 경우 스페인과 중남미지역 언어가 가지는 약간의 차이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큰 난제였다. 우리 시에서 잘 사용하지 않은 구두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도 쉽지 않았다. 또한 모든 번역자가 느끼는 문제이겠지만, 우리 문화에만 있는 어휘를 어떻게 풀어쓸 것인가도 고민할 문제였다.

  비교적 의미 전달이 명확하다고 평가되어지는 시인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번역하는 과정에서 시구의 중의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번역 과정 내내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공역자, 원저자와의 다양한 논의를 통해 일정하게 해소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명확한 역할분담 체계가 있었으면 좀더 수월하게 번역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마지막으로 번역을 검토해주신 선생님들의 많은 지적도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족으로 김광규 시의 제목이 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라는 노래는 중남미의 Los tres diamantes라는 그룹의 만월(Luna llena)이라는 곡을 번안한 곡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 『Pais de neblinas 김광규 시선집』은 재단의 2002년 한국문학 번역지원 대상작으로 선정되어 번역되었다.
이성훈
글 / 이성훈_번역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1966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