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유동하는, 가슴 밑창의 그대

- 정희성 시인과의 만남

  • 대산초대석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유동하는, 가슴 밑창의 그대

- 정희성 시인과의 만남


▲     © 운영자
숭문학교로 시인을 찾아갔다. 시인이 30년 넘게 일해온 곳이다. 교무실에 앉은 시인을 보고 싶었다.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의 자리를 보고 싶었던 것일까.  


마포에 있던 창비에서 일하던 때, 냉면을 먹으러 그 근처에 자주 갔으나 학교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일행은 그 옆에 시인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음을 서로 상기시키곤 했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한더위의 입맛을 달래려 그곳까지 냉면을 먹으러 갈 일도 없어졌다. 창비마저 파주로 이사를 가서 그곳을 언덕 삼아 뵐 일도 없어졌다. 자연 스쳐서라도 뵐 일이 드물어진 것이다.

약속한 날 나는 조금 늦었다. 함께 가기로 했던 박형준 시인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 방학 중인데도 보충수업이 한창인 복도를 지나 이층 교무실로 들어섰을 때, 시인은 뜻하지 않게 가벼운 등산복 차림이었다. 방학이면 늘 떠날 궁리를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교무실에 그런 차림으로 앉아 계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제 보충수업은 젊은 선생님들 몫으로 넘겨두었다고.

좀 쑥스러운 노릇이지만, 시인의 책상과 사각으로 놓인 다른 선생님의 자리에 앉아 좀 면구스럽기도 한 질문을 몇가지 드렸다. 시인도 면구스럽기는 마찬가지인지 내가 괜히 수첩을 뒤적이며 뜸을 들이는 동안 하릴없이 서랍을 여닫았다.

최근의 시에 관한 몇가지를 여쭙자는 것이었지만, 자연 서두에는 지금까지 낸 네 권의 시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시력에 시인의 과작은 알려진 바다. 과작인 만큼 시를 한 편 쓰면 시인 스스로도 대견하고 옹골진 모양이다. 그것을 발표도 하지 않고 안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을 한다. 처음에는 솔직히, 불경스럽게도, 그거 좀 남 우세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었다. 뭐 그럴 것까지야, 싶던 것이다. 그런데 또 언젠가는 얄밉기도 했다. 빡빡한 직장 일도 힘겹고, 가뜩이나 글도 안 써져서 죽을 맛인데 새로 쓴 시라고 가지고 와서 꺼내 읽어줄 때면 묘하게 뒤틀린 시새움까지 일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시인을 만날 때마다 지난 시집 이후로 시가 몇 편이나 쌓였는지 묻는 것으로 인사를 삼기도 했다.  

내가 시가(詩歌) 등 고전의 향취가 묻어나는 첫 시집 『답청』과, 시인 자신의 말로 '가파른 시대'를 가파른 언어로 건너온 『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그리고 성찰의 여백이 너른 『詩를 찾아서』를 따로 놓으려는 뜻을 비쳤을 때, 시인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은 시인의 드문 산문 『시를 찾아나서며』에도 언급된 바다. 시인은 거기서 자신의 시적 변화의 도정을 담담하게 피력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시인의 육성(1997년 '시와시학상' 수상연설)으로 들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그 글을 읽으면서 시인에게 굳이 덧붙여 여쭙고 싶은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시인의 글은 시든 산문이든 쉽되 여백이 깊다.

그렇지만 또 『詩를 찾아서』에서의 변화를 내려놓고 어떤 얘기를 끌어가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시인은 "철 들고 난 뒤 30년 동안 젊음이 고스란히 군사정권 아래 놓여 있었는데, 그 가파른 시대를 통과해오면서 이제 좀 너그러움을 생각할 나이가 된 것 아니냐"고 넌지시 일렀다. 세상이 달라졌고, 독자가 달라졌고, 무엇보다 시인 자신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가 '변했다'고 못박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래도 여유가 좀 생긴 만큼 세상의, 삶의 폭넓은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할 때가 되었으며, 그런 만큼 '넓어졌다'고 보아줬으면 좋겠다는 청이었다.

나는 최근 몇 년간의 시인의 두 번의 인도 길을 여쭈었다. 인도에 다녀온 뒤로 그때 얘기를 자주 하셨고, 그때 얻은 시도 여러 편 발표했다. 시인은 썼다. "언젠가 와본 적 있는 것처럼 낯익은 그곳 / 마침내 돌아가야 할 것처럼 눈에 밟히는 그곳"(「인도의 기억」). "인도가 나를 사로잡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 경치라는 건 우리나라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묘한 향수라고 할까? 우리 과거의 어떤 모습이 보여요. 크게 산업화 안된 농촌의 모습. 짐승과 사람이 분화 안된 상태에서 어우러져 있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시인은 그곳에서 어느 농장 관리인의 집에 든 적이 있다. 단칸집. 윗목에는 염소가 살고 아랫목에는 아이와 부부가 살을 맞대고 산다. 불결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상하게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이른바 '위생'이라는 명분으로 감시되지 않는 '근대 이전'이다. 경우가 좀 다르긴 해도,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한겨울 단칸 셋방에서 새벽이면 연탄불 기운이 손바닥만하게 남은 아랫목을 찾아 새신랑과 그 아내와, 처제의 발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바닥을 마주하던 때.

시인을 만나기 전에 나는 이런 짐작을 했다. 시인은 인도 길에서 '덧씌워지지 않는' 인간의 삶을, 현란함과 속도에 가려진 우리 삶의 벗겨진 속내를 본 것은 아닐까 하고. 욕망의 노예로서의 삶의 공간에서 욕망의 이면을 그대로 드러낸, 그러면서 욕망의 처음과 끝자락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행(遊行)하는 거리로의 여행. 거기서 시인은 자기 자신과 우리의 속내를 처연하게 바라보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시인의 말은 소박했고, 내 짐작은 다분히 마련된 자리를 채울 문장을 의식한 것이었다.

시인은 첫 인도 길 이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붓다가 성밖으로 나왔다가 그냥 나무 그늘 아래 주저 앉아 버린 것은 그 가난한 백성들을 두고 차마 야멸차게 궁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을 아닐까 하고. 어깨 너머로 초기불교를 공부하던 나는 참 독특한 시각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썼다. "오직 죽기 위해 갠지즈강에 온 노인들이 / 내 발목을 잡고 빈손을 내밀었네"(「갠지즈강」). 그리고 그 갠지즈강은 곧 서울역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 ……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서울역 1998」).   

내처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이전에 비해서 여행시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또 여행이 잦은 것도 사실인데 시인에게 여행이란 어떤 것인가고. 3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삶이 뜻없는 것은 아니되 변화 없는 삶인 것은 분명했다. 그 역시 직장이고 생업인 것이다. 쳇바퀴. 아이들에게 그렇듯이. 한마디로 "건드려 주는 게 없다"고 시인은 말했다. 계기. 한편으로 그것은 일상적 삶에 눌린 의식의 전복이기도 할 터였다. 시인은 여행을 할 때 "시가 와서 나를 건드린다"고 표현했다. 이른바 무너뜨려야 할 '적'이 분명하던 시절, 열정과 치열성만이 요구되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만한 여유"가 없었던 시절, 오히려 자기 내면의 여유로움이나 욕망을 드러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자기를 단속하던 시인은 이제 여행을 통해서 '시를 기다리는' 것이다. "솔직히 허전했어요. 공허하고. 시를 통해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볼 때가 된 거지요." "여행을 하다 보면 시가 어떤 계기로 해서 자연스럽게 오고, 자연스럽게 와서 나를 울려요. 그것을 독자와 나누어 갖는 것이지요."

시인을 처음 뵌 것이 어느덧 십 년이 넘어간다. 등단하기 전 어느 시 창작 교실에서 스치듯 뵈었고, 등단하고 나서는 직장이 직장이던 터라 심심찮게 뵈었다. 내가 늘 시인에게 느낀 것은 '시와 삶'이 일치하는 시인의 면모였다. 늘 시인에게 따라다니는 얘기이므로 여기서 달리 덧붙일 것은 없겠다. 그래서 실없는 얘기를 한마디하자면, 시인도 함께 하던 어느 술자리에서 이런 농담이 오간 적 있다. 시인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시는 좋은데 그 사람은 못된 경우, 시가 곧 그 사람인 경우, 사람은 좋은데 시는 시원찮은 경우. 그때 우리는 시는 좋은데 그 사람 못된 경우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취중진담은 싱거운 것이다. 그 얘기를 다시 꺼냈을 때, 시인은 '몸을 사렸다'. 시인은 누구를 드러내놓고 비판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왕 꺼낸 김에 하나 더. 시인에게 늘 따라붙는 '선비' 운운에 관한 것이다. 시인은 한동안 가끔 야한 비디오를 보고 그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갔다와서 한마디했다. "아빠 때문에 창피해서 비디오를 못 빌리러 가겠어. 왜 자꾸 이상한 비디오만 빌려다보는 거야!" 어쩔거나! 시인은 그 선비라는 말로 사람들이 자신을 가두어놓는다고 '투덜거린다'. 거기다 빼도 박도 못할 교사인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튀어볼 재간이 없다'. 오래 전, 시인이 강남에서 술자리를 파하고 수유리의 댁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였다. 청량리 쪽으로 간다는 웬 건장한 젊은이 하나와 합승을 했다. 청량리 거진 다 와서 택시 기사가 젊은이에게 물었다. "어디서 내릴 거요." 젊은이가 불쑥 우렁찬 목소리를 토했다. "오팔팔이요!" 시인 왈, "참 솔직하데. 에둘러서 말해도 될 텐데이. 참 용기 있데." 혀를 내두르던 시인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술자리에서 그쳐야 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내게는 그것이 시인의 선비다움이 아닌가 싶다. 욕망을 다스리는 자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시종으로 살지도 않는다. 그는 욕망을 인정하고 바라본다. 그럴 때 욕망은 비로소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온다. 시인은 썼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소나기」)고.

여쭙고 싶은 한마디를 그예 꺼냈다. 삶에서 시란 무엇인가? 그러나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시의 육체는 만지지 못했다"고. '시의 핵'을 건드렸다면 시는 더 이상 못 쓰게 될 것이라고. 시가 뭔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시인의 삶이 아니겠느냐고. "이거다 하고 잡았는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새로운 작품을 쓴다"고. 외람되지만, 은근히 딴죽을 좀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시도 욕망 아니냐고. 저 가팔랐던 시대에 이른바 '악'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욕망의 노예였지만, 그걸 무너뜨리려던 사람들도 욕망에서 결코 자유로웠던 게 아니지 않느냐고. 우리가 내내 그걸 봐오지 않았느냐고. 욕망이란 결국 어딘가에 집요하게 가서 이루고 싶어하는 그 열망일 터인데, 시라는 것도 결국 거기서 자유롭지 않은 거 아니냐고. 참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해보고 싶었고, 결국 했다. 시인은 그것이 곤혹스러운 딜레마이며, 그 경계 또한 불분명함을 부인하지 않았다. "갈등이나 괴로움이 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런 게 없는 문학은 재미없죠. 결국 시란 갈등과 괴로움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죠. 평정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게 소멸될 수는 없다고 봐요."

결국 슬쩍 비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은 시인이 『詩를 찾아서』의 발문에서 '그대'란 결국 시인의 가슴 밑창에 남겨 있는 사랑이 아닌가라고 했는데, 『답청』으로부터 여러 이름으로 숨바꼭질하는 그 '그대'라는 것도 결국은 유동하는 것이겠지요?" "막연할 때도 있고, 구체적일 때도 있어요. 그게 아니다, 부정할 때도 있지요." 수업시간에나 할 만한 질문을 드렸다. "언어라는 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일까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는 없어요. 하고 나면 오히려 공허할 뿐이죠. 오히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문학이 없을 거예요. 부족한 매체를 가지고 애쓰는 과정에서 재미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는 거죠." 그 즈음에 박형준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뒤늦게라도 합류하겠다는 것이다. 시인은 끊어진 틈을 이으며 말했다. "완벽하게 표현했다, 기막히다고 무릎을 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릎를 쳤던 때가 한번 있기는 있었어요. 『답청』에 실려 있는 어느 구절인데, 지금은 그 구절이 어느 구절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시인은 욕망을,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인에게 시의 길은 끊임없는 그리움의 길이면서 또한 '돌아봄'의 길이 아닌가 싶었다.

창밖으로 휴대폰을 귀에 댄 박형준 시인이 보였다. 어디쯤에서 멎고 자리를 옮길까 궁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스레 점심은 냉면이었다. 자리를 옮겨서 흑맥주도 조금 했다. 돌아오면서도 내내 북한산 계곡으로나 갈 걸 그랬나 싶었다. 방고래 뚫는다고 애먼 아궁이만 허물어놓은 게 아닌가고. 그러나 이미 마련된 자리를 무를 수는 없었다. 늘 하는 말씀이고, 또 드리는 말씀이지만 언제 여행길에서 뵙고 싶다.            

 

장철문
글 / 장철문_시인. 1966년생. 시집 『바람의 서쪽』, 동화 『노루삼촌』 등.

정희성_시인, 숭문고 교사. 1945년생.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詩를 찾아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