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문학의 계절, 문학상의 계절

  • 이 계절의 문학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문학의 계절, 문학상의 계절

   가을은 문학의 계절이다. 뭐, 낙엽이 떨어지고 따라서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그딴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실제적으로’ 문학의 계절이다. 왜냐하면 이 계절에 유수의 문학상들이 잇따라 발표되기 때문이다. 문학상 발표 때문에 문학의 계절이라니, 그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된다. 요즘처럼 문학 알기를 시쳇말로 어디 뭐로 아는 세태에 그나마 문학상이 있어 ‘문학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올 가을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필자가 아는 것만으로도) 십수종의 문학상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국가적 흥망이 걸려있는’ 대선자금 따위에 비해서는, 세간의 이목이야 크게 끌지 못했지만, 그래도 문단 곳곳에선 문학상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들로 안주거리를 삼아 술독깨나 비웠다. 그중 몇몇 유수 문학상에 대해 일별해 보자.

  우선 중앙일보에서 주관하는 미당문학상(시부문)과 황순원문학상(소설부문)의 수상자로 최승호 시인과 소설가 방현석 씨가 각각 뽑혔다. 최 시인은 시 「텔레비전」(『세계의문학』 2003년 봄호)으로, 방현석씨는 중편소설 「존재의 형식」(『창작과비평』 2002년 겨울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또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수상작엔 소설가 김연수 씨의 창작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가 선정됐다.

  제 16회 동서문학상엔 시인 마종기 씨와 소설가 정찬 씨가 각각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와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로 수상자로 결정됐다. 이밖에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신세훈)에서 주관하는 제 19회 윤동주문학상엔 아동문학가 신현득 씨가 동시집 『대추나무 대추씨』로 수상자로 선정됐으며, 제 22회 조연현문학상 수상자로는 문학평론가 장윤익 씨(평론집 『사회주의 문학과 문학이론』)가 뽑혔다. 제 5회 백석문학상엔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의 저자 박영근 씨가, 제 20회 요산문학상에 소설가 조갑상 씨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대산문학상 수상자가 지난 11월 3일 발표됐다. 시인 김광규 씨의 시집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와 소설가 송기원 씨의 창작집 『사람의 향기』(창작과비평사)가 제 11회 대산문학상의 시와 소설 부문 수상작으로 각각 선정된 것. 특히 송기원 씨의 『사람의 향기』는 김동리문학상 수상작으로도 뽑혀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중 대산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송기원 씨의 『사람의 향기』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최승호 시인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송씨의 네번째 창작집인 『사람의 향기』는 작가의 어릴 적 고향마을 사람들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을 모은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가슴 저 깊숙이 묻어두었던 ‘악동’ 시절의 이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 모은다. 빛바랜 사진 속에 들어 있던 인물들이 작가의 시선을 받아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하면서 빙긋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하나, 둘 툭툭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오면서 작가의 어깨를 껴안는다. 작가는 때로는 그들을 마주 껴안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앞에서 통곡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소리높여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끝순이 누님, 울보 유생이, 물총새 성관이, 헤조갈래, 바보 막둥이, 폰개 성…… 한편 한편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그들의 삶이, 삶의 신산(辛酸)이 눈앞에 보이는 듯 그려진다. 작가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마을 ‘가메뚝’의 스산한 풍경이, 장터의 시끌벅적함이 배경 화면이다.

  이 소설집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인물은, 항용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바로 작가 자신이다. 특히 이번 연작소설집은 ‘번뜩이는 시어(詩語)’를 뱉어내는 ‘송기원 소설’의 마력이 어디에서 왔으며, 작가의 깊은 속내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송기원 씨는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제 내 자신의 얘기는 죽을 때까지 안할 생각”이라며 “자기고백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너무 우려먹은 것 같다. 이제 남의 얘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사생아였던 그는 “생부가 죽을 때까지 얼굴을 몰랐으며 어머니로부터 매우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내가 30대 중반이 돼 어느날 보니 생부가 했다는 일을 그대로 하고 있더라”며 “그때부터 생부가 이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최승호 시인은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하늘이라는 무한(無限)화면에는 / 구름의 드라마, /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 그는 수줍은지 /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 (중략) /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 쉬임없이 /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하늘로 대변되는 선경(仙境)을 제쳐두고 ‘개울가에 처박힌 텔레비전’을 통해 시인은 ‘쉬임없이 흘러내리는 서늘한 가을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속세를 통해 선계를 엿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상작이 실려 있는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에 실려 있는 시들은 그같은 추정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선(禪)에 대한 시인의 몰두가 시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선은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며, 언어의 길이 끊어지는 자리로 몰고 가는 것이다. 반면 시는 지금, 여기를 형상화하는 것이므로 선과 시는 적대적 관계에 있기도 하다”고 밝혔다. 자신의 시에 드러나고 있는 것은 단지 ‘선기(禪氣)’에 불과하다고 애써 자리를 낮춰 잡았다.

  한편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인 소설가 방현석씨의 『존재의 형식』에서 작중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베트남 혁명시인 반레가 지난 10월 초 한국을 방문해 한국문단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본명이 ‘레지투이’인 반레의 환영 행사(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엔 김지하 시인을 비롯, 김영현 김정환 최인석 강태형 김남일 방현석 한창훈 고영직 등 문인 1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소설 속 반레와 너무나 흡사한 느낌을 주어서인지 익히 알고 지내던 사람과 함께하는 듯한, 화기애애한 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 어찌 ‘문학의 계절’이라고 아니할 수 있을까.

김영번
글 / 김영번_문화일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