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학상
* 황폐한 세상의 상처받은 삶들, 그 서정적 형상화와 서사적 번역 - 번역 부문 『Vögel 새』

  • 대산문학상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 황폐한 세상의 상처받은 삶들, 그 서정적 형상화와 서사적 번역 - 번역 부문 『Vögel 새』

   독일의 펜드라곤(Pendragon) 출판사에서 지난해에 출판된 오정희의 소설 『새』가 금년에 독일에서 리베라투르프라이스(LiBeraturpreis)라는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수상식은 지난 10월 프랑크푸르트 그리스도 교회에서 있었고, 오정희 씨는 이 상을 받은 16번째 작가가 되었다.

   리베라투르상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문학상이다. 이 상은 그 전년에 독일어로 번역된 외국 문학 작품을 심사 대상으로 하며, 저자는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 이는 이 문학상이 여성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 3세계에서 여성 작가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는 취지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심사 과정도 여느 문학상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수상 후보작들을 전문적 문인들이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추천을 받아 결정하며, 그 후에 작가, 비평가, 출판계와 독자 대표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을 받는 작품은 이른바 전문가들의 요구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예술성 뿐 아니라 독일의 일반 독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는 대중성도 지녀야 한다. 『새』는, 원작과 이 원작을 성실하게 독어로 옮긴 번역판 모두, 이 요구들을 충족시킨 듯하다.

  소설 『새』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그저 황폐하기만 하다. 무지하고 무식하나 나름대로 영악하고 간교한 인간상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상처를 받는 삶을 숙명처럼 살아가는 인간군들, 이 인물들의 황폐한 일상과 무너져가는 삶의 모습이 12살 난 소녀 우미의 해맑은 눈을 통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다.

  우미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의 달동네에서 동생 우일이와 같이 사는 소녀 가장이다. 다정했던 어머니,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준 어머니는 공사판을 떠도는 노가다 아버지의 거칠고 난폭한 폭력에 견디다 못해 가출했고, 아버지마저 새로 얻은 여자가 몰래 도망친 후 남매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우미 남매와 같이 사는 셋집 사람들, 안집 아주머니, 휠체어에 묶여 살아야 하는 주인집 딸, 그녀의 남편, 옆방의 아저씨들, 이들은 모두 무엇인가 가슴 한편에 응어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삶은 고달프며, 세상은 삭막하고 거짓과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우미의 천진무구한 상상들, 예를 들면 장님 침구사 장씨가 “견딜 수 없이 무서운” 이 세상을 보지 않으려고 태어나는 순간 눈을 꾹 감아버려 장님이 되었을 것 같다는 우미의 상상은 이 세계의 실상에 대한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분석이자 해석일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우미의 ‘우주의 가장 예쁜 소녀’의 꿈이나 우일이의 ‘우주 제일의 남자’의 꿈, 빛의 아들로 태어나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악당들을 물리치는 ‘우주 소년 토토’처럼 허공을 마음껏 날고픈 우일이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꿈은 새장 안에 갇혀있는 옆방 아저씨의 새처럼 결코 나래를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새처럼 죽음이라는 어두운 공간 저편의 세상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오정희의 『새』는 그러나 이 세상을 개혁해 보자는 요란한 참여의 외침은 아니다. 세계의 모순들과 부딪쳐 가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주인공의 삶을 기록하는 이른바 성장 소설이나 발전 소설은 더욱 더 아니다. 작가는 이 세상의 황폐한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언어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새』의 언어는 “비열하고 누추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데려가련다는 듯이” 슬프고 아름답게 울리는 김씨 아저씨의 클라리넷 소리같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서정적 언어가 더 할 수 없이 황폐한 삶의 행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역자들은 이 아름다운 말을 독일어로 옮기는 데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보기에는, 원작의 서정적 언어는 독어 번역에서 좀더 밋밋해지고 좀더 절제된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좀더 서사적 언어가 된 것이다. 독어 번역본의 바로 이러한 서사적 정조가 오히려 이 작품을 독일의 일반 독자들이 무난하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요인으로도 생각된다.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세상에서 완벽한 번역이 어디 있을까? 있다면 그 것은 아마도 신의 솜씨일 것이다. 




김수용
글 / 김수용_연세대 독문과 교수. 1943년생. 평론집 『사회의 발전과 의미의 변천』 『고전주의 문학이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