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의 창립자로서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낸 대산(大山) 신용호(愼鏞虎) 선생께서 지난 9월 19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는 1992년 12월, 25억여원의 기금을 쾌척하여 한국문학을 지원하는 국내 유일의 재단을 출범시켰다. 설립 당시는 말할 것 없고 지금까지도 이 재단이 왜 문학만을 지원하는 재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문학만을 지원하는 민간재단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문인들은 문학만을 지원하는 민간재단이 있다는 데 놀라움을 표시하는 일이 많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유명 출판사에서 문학인들을 지원하거나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대기업을 배경으로한 재단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은 대체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또는 공연장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의 경우, 정부 산하의 문예진흥원이나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부분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나 지원 정도가 미미할 뿐 아니라 문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국내 출판사들도 열악한 환경 하에서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직접적으로 자원하는 일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대산 선생께서는 왜 이땅에 최초로 문학만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었을까.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교보문고 입구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초상화가 진열되어 있는데 한 중앙에 빈칸 하나를 남겨 놓고 있다. 대산 선생은 23년 전 이 문고를 설립할 때 우리나라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문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탈 만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타계하는 순간까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그가 종로 1가 1번지에 교보빌딩을 올리고 나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같은 지하 2천7백여평의 공간에 채산이 맞지 않는 책방을 차리겠다는 결단을 내린것도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1917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고 항일운동에 연루되었던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주경야독하였으며 19세 때 중국대륙의 신천지를 찾아나서 젊은 포부를 펼치다가 해방과 더불어 29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혼란스런 해방 공간에서 출판업 등의 사업을 펼쳤지만 결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2세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는 확신을 갖고 생명보험회사를 설립한 다음 세계 보험 역사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교육보험’이라는 신제도를 창안하여 학부모들의 적은 저축으로 어린이들이 최고학부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 후 교육보험의 아이디어는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받아 세계보험총회에서 세계보험대상, 세계보험전당 월계관상 등을 수상하고 미국 알라바마대학에서는 보험분야의 최고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국민교육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단일공간으로서는 세계 최대인 교보문고를 만들어 하루 평균 5만명의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서가 주변에서 이 책 저 책을 섭렵하며 독서하고 숙제하는 공간을 제공하면서 한없는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천안 태조산 자락에 계성원(啓性院)이라는 국내 최고 수준의 연수원을 만들어 교보 직원들은 말할 것 없고 문학에 소질있는 중고생들에게 부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백일장을 통해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을 주기도 했다.
그가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했듯이 문학만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사설재단을 만든 것도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생 동안 학교 교육을 받아본 일이 없는 그는 이력서의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는 말을 즐겨 써넣곤 했다. 균형잡힌 판단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광화문의 교보빌딩과 서초동의 교보타워는 서울의 수많은 건물 가운데서도 명물로 꼽히고 있다. 23년 전에 완공된 광화문 빌딩은 요즘 지어지는 주변 건물에 비해 손색이 없고 금년에 준공된 서초동 빌딩은 가장 현대적인 예술빌딩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교보지사 건물을 포함한 43개의 빌딩이 올라서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건축과 디자인, 인테리어 등에 대한 식견과 조예는 전문가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서초동 빌딩은 마리오 보타라는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설계도를 17번이나 변경해야 할 정도로 그의 의견 제시가 있었음에도 그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어서 보타 씨는 한마디 불평없이 그에 따랐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의 틈새에서 기상천외의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그 꿈을 실현하는 것을 즐거워 했다.
무학에서 무일푼으로 오늘의 교보금융그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고 그 많은 문화․사회공익사업을 펼치기까지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뇌와 역경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남다른 근면 성실한 자세와 끈질긴 집념은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일생동안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되내이던 그의 말을 그가 떠난 이 마당에 다시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 대산 선생의 생애와 철학 ◀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한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20세기 한국경제를 빛낸 기업인 중 한 사람이다. 보험 외길을 걸어온 그는 “보험의 대스승”, “최고명예교수”로 추대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산은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의 명산인 월출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노송리 솔안마을에서 부친 신성언(愼聖彦) 선생과 모친 유매순(柳每順)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명문 사대부가였으나 한학자이던 부친이 일제 시대에 애국지사로 활동하면서 수탈과 핍박이 가중되어 가세가 기울었고 집안 살림은 매우 어려웠다.
어린 시절 집안을 홀로 이끈 어머니로부터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삶의 지혜를 배운 대산은 독학으로 배움의 기회를 열었다. 그에게는 학교를 다닌 일도 없었고, 글자 하나 배운 스승도 없었다. 다만 그가 처한 환경이 학교이고 스승이었다.
책과 씨름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청년 대산은 1936년 가을, 드넓은 중국 땅을 향해 떠났다. 낯선 곳이었지만 정신적 스승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을 여럿 만나 세상을 배웠고, 모르는 것은 질문하고 필요한 것은 찾아내는 남다른 열정으로 실력을 키웠다. 이 때부터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고”란 대산의 자기개발 요령이자 학습방법이 자리 잡았다.
대산은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물류 흐름을 통찰하여 양곡 수송사업을 착수하였고 괄목할 만한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는 10년 동안 애써 닦은 기반을 미련없이 버리고 귀국했다. 다시 빈 손이였지만 고국에 돌아온 그에게는 대륙 생활을 통해 얻은 독립심과 사업 능력이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 남아 있었다.
해방 조국의 혼란과 이어진 한국전쟁의 발발 등 국가와 민족의 계속된 수난에 고민하던 대산은 우리 민족의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안 되는 상황에서 유난히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면 이 나라가 다시 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국민교육 진흥을 통하여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민족자본 형성을 통해 경제자립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사명감이 되었고 세계 최초로 생명보험의 원리와 청소년 교육에 대한 사명을 연결해 ‘생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보험 분야인 “교육보험” 제도를 창안하게 했다.
대산은 회사 설립을 위해 1백명이 넘는 사회, 경제계 인사를 접촉하였으나 단 한사람의 협력자를 얻는데 그치는 등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산은 좌절하지 않고 각계의 여러 사람들을 설득하고 밤낮으로 회사 설립을 준비한 끝에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인 “진학보험”을 선보였다. 성인 중 80%가 흡연가이던 당시 상황에 착안하여 내건 ‘담배 1갑 절약하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제안은 커다란 반향을 얻어 교육보험 붐을 일으켰다.
고객 재산을 관리하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투명한 정도경영을 흠결없이 실천하는 기업인은 흔하지 않다. 그에게 주어진 “왕관상”(세계대학총장회, 1976), “세계보험대상”(세계보험총회, 1983), “세계보험전당 월계관상”(세계보험총회, 1996) 그리고 “APO 국가상”(아시아생산성기구, 2000) 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대산의 빛나는 기업정신을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젊은 대학생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선정되어 “기업윤리대상”(연세대, 1996)을 받았고, 한국경영사학회로부터 생존자로서는 최초로 “창업대상”(1996)을 수상하였다. “신용호 경제사상과 경영철학”은 대학의 공개강좌로 개설되어 개인과 기업의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를 실감케 하고 있다.
대산은 유년시절 책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세상과 만났다. 그는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이 책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길 바랐다. 그의 사명인 국민교육 진흥을 구현하는 뜻에서 수익성을 강조하는 임원진과 관계 당국자들을 1년 넘게 설득해 광화문 본사사옥에 단일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교보문고를 설립(1980)했다. 그는 천만명 독서인구 저변확대운동을 전개하여 국민 정신문화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또한 1983년부터 동경대학을 비롯하여 북경대학, 하버드대학 등 세계 유수 대학과 외국문화원에 수만권의 한국학 도서를 기증해오고 있다. 교보문고는 세계적인 명소이자 한국 지성인과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대산은 국내 기업들의 지원에서 소외되어 있는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낙후된 한국농촌의 현실을 살리기 위해 대산농촌문화재단을 설립(1991)하였고, 민족문화 창달과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대산문화재단(1992)을, 환경친화적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을 설립(1997)했다. 대산은 문화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문화진흥의 길을 몸소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기업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1996)을 받았다. 또한 대산문화재단을 통해 펼쳐온 한국문학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공익 문화사업은 교보생명이 “메세나대상 대통령상”을 수상(2001)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산은 단순히 돈을 버는 길이 아닌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급히 펼쳐야 할 일에 뛰어들었다. 교육보험 사업은 그 시작이었고 교보문고는 경제적인 풍요에 떠밀리는 정신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그는 농촌을 살리고 민족문화를 살리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닌 모두를 위한 외로우면서도 넓고 큰 길을 선택했다. 한 평생 확고한 신념과 의지로 도전한 그의 외길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은 그가 기업경영과 동시에 배움의 길, 사랑의 길을 개척하였고 문화의 길, 예술의 길을 넓혀온 때문일 것이다.
▶ 弔 詩 ◀
고 은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대산 신용호 선생 생전의 거짓 없는 모습
카랑카랑한 모습
다시 볼 수 없게 이승을 떠나시는 날입니다.
돌아보니 87생애의 역정입니다.
여든 살이기 까지는
단 한 번도 생일잔치 따위 없이
오직 일 속에 묻혀
일 속을 헤쳐오신 사람입니다.
대산 신용호 선생
당신은 생나무에 맨손가락으로
구멍을 세 개 네 개 뚫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막힌 벼랑 뚫고
그렇게 닫힌 문 열고
그렇게 메워진 바닥 파헤쳐
저 높은 곳
저 낮은 곳에 다다르라 가르치시던
당신은 이제 이승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일찍이 막막한 식민지시대
아버지와 형들
일제와 맞서 싸우는 동안
감옥살이 날들
도망살이 날들
그런 집안이라 제대로 자라날 겨를 없이
어린 아이 혼자 병들어 누웠습니다.
그러다가 열 다섯 살 무렵
혼자 선생이었고
혼자 제자되어 글자 익혀갔습니다.
그런 혼자의 삶으로 마침내 고향을 뛰쳐나갔습니다.
겨울밤 월출산 위 조각달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고향 영영 떠나
고난의 나그네 되었으니
두만강 너머 벌판이 터전이었습니다.
북만주 목단강 자무스
아니 소만국경 하이라얼까지 떠돌며
젊은 날의 시련 막무가내였습니다.
시베리아 영하45도 혹한 속에서
당신은 이불도 없이 잠을 청했고
한 끼 수수죽 옥수수죽으로 하루를 견디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세월 가운데서
발해만 대련 시절에는 중학생이었고
북경시절에는 북경대 대학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혁명가 신갑범 선생을 만났고
혁명가이자 시인인 이육사 선생을 만나
그이들의 애국에 수행하였습니다.
청도에도 가 있었고
상해에도 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때로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8․15 조국광복 민족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귀국선을 탄 애국 동포이던 당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과제에 부딛혀
해방된 산천을 떠돌았습니다.
그런 날들이 다 지나가고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분단은 끝내 골육상잔을 몰아왔습니다.
6․25 사변 그 폐허에 서서 당신은 당신의 운명인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교육과 문화
그것을 바쳐줄 사업이었습니다.
생나무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벌써 60년대는 국민적이었고
70년대에는 자못 세계적이었습니다.
드디어 80년대에는 세계 정상의 보험이었습니다.
시대가 아플 때에도
당신의 사업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어 올라갔습니다.
대한교보는
90년대 교보생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밖에서는
세계보험대상
보험의 왕관상
세계보험협회 보험의 전당 최고의 명예상
월계관상과 국가상이 바쳐졌고
안에서는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영예입니다.
더 이상 꿈꿀 것 없는 생애였습니다.
이제 힘찬 후계로 하여금
새로운 세기의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족과 회사의 미더운 얼굴들이
당신의 의지를 찬란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하직하는 오늘은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곧은 신념
그 깊은 탐미
그 지독한 인내의 의지
이제 그 치열한 인간정신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그러나 대산 신용호 선생 혼백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우리는 오래오래 당신을 가슴에 새길 것입니다.
- 윤상철
- 글 / 윤상철_대산문화재단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