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고운 빛으로 바뀌어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물들어가는 가을 색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봄이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가을로 바뀐 것이다. 가슴에 배어드는 빈 바람을 느끼면서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허무함을 주체하기 어렵다. 마음이 비어 있어서인지 바라보는 가을 색도 달라 보인다. 왠지 정겹게 보이지 않는다.
물들여지는 잎의 색깔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어느 한 순간에 단풍이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은행 잎이 노랗게 물들여지는 데에도 순서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연한 색으로 물들여지는 것이었다. 마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다는 점을 애써 나타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아니 절규하고 있었다.
노랗게 물들여진 은행 나무를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곱다고만 생각하였었다. 은행 잎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들여지지 않은 은행들은 예쁘지 않다고 타박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 잎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가는 세월을 붙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물들여지지 않고 싶어하는 은행 잎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왜 몰랐을까. 숱한 가을을 보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지만 은행 나무의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예쁜 색깔에 취해 즐거워만 하였지 은행 나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이기적이었다. 아니 나 자신의 삶을 추구하느라 바라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완성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물들여지는 단풍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나의 삶은 충만한 삶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나의 거울이란 평범한 진리를 외면하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가는 세월을 원망하고만 있었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 안을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속 빈 강정이란 말이 딱 맞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이란 거울에 비추어보니 허점 투성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엄연한 현실에 그만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다는 점을 왜 알지 못하였을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에 따라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진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런 사실을 입으로만 알았지 행동으로 옮길 줄을 몰랐다. 나 자신을 충실히 하는 데에는 땀을 흘리지 않고 남들이 쌓아놓은 노적만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바늘 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후회와 회한이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돌아다 보면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모두 다 한숨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들 뿐이다. 조금만 더 했으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을 억제하기 어렵다. 좀 더 땀을 흘렸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터였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
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 눈 앞의 작은 이익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낸 지난 세월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러니 스치는 작은 바람에도 뻥 뚫려버린 가슴을 어찌하지 못해 흔들릴 밖에.
물들여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은행 잎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이 알려 주었지만 귀를 갖지 못하였으니 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니 겨우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다. 가을 색이 말해주는 대로 살아야겠다. 나 보다는 상대방을 위할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
- 정기상
- 글 / 정기상_아동문학가. 1955년생. 동화『용감한 까치형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