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르 탕(Autres Temps)은 한국의 전통적 시인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로 알려져 있다. 이미 한용운의 『님의 침묵 Le Silence de Nim』,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Ciel, vent, etoiles et poèmes』, 김소월의 『진달래꽃 Fleurs d'azalée』그리고 박목월의 『나그네 Le Passant』등이 이 출판사에서 나왔으며, 이번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시선집 『학 La Grue』의 불역 시집을 상재함으로써 프랑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 시인에 관심을 표명하는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물론 번역의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역 작업에 임하는 번역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불역 시집은 조지훈의 시집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에서 발췌한 1백10여편의 시를 담고 있으며, 책머리에 시인의 개인사를 당시 한국사와 비교하여 수록하고 있다.
시 번역은 텍스트에 대한 번역자의 사랑과 열정에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다면 텍스트 내부에 드리운 언어의 그물망에 걸린 채 끝없이 당해야 하는 고통의 형벌을 번역자는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의 번역자들도 이러한 힘든 작업 속에서 적지 않는 분량의 시를 번역해 내었고, 일정한 성과도 거두었다고 본다. 특히, 이번 조지훈의 시처럼 모국어적 장치 속에서 한국의 정서를 듬뿍 담아내고 있는 작품들의 번역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시집을 만들어낸 김현주 씨와 피에르 메지니(Pierre Mésini) 씨의 경우 또한 그렇다.
번역자들의 고통이 수반된 역서에 대한 서평은 매우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특히 한-불 번역의 경우, 번역에 정답이란 것이 없으며(장르가 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과연 어느 선에 와야 이제 괜찮다고 펜을 놓을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물을 놓고 어디가 문제고 어디가 좋다는 한량한 이야기는 번역자들의 노고를 훼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프랑스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 보면, 몇 가지 지적은 가능할 것이다. 우선 서문을 보도록 하자. 한국사와 나란히 기술된 시인의 연보가 과연 프랑스 독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미 한국사에 관심이 있거나 일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대다수의 불어권 독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통상적으로 하듯, 시인의 연보는 뒤에 붙이고, 여기서는 번역된 시편들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번역자들은 오히려 독자들이 “한국어를 모르기에 그런 면에서” “텍스트에 대한 문학적 비평”은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불어로 쓰여지는 비평문과 한국어를 모르는 독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
시편들을 읽어가며 나는 역자들이 과연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고민했을 자리와 그곳에 아물지 않고 남아 있는 번역의 상처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예컨대, 조지훈의 저 유명한 시 「승무」에서 한국어가 모국어인 우리는 언어의 기막힌 율동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춤사위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지적 해석도 오히려 감상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러한 시를 어떻게 불어로 옮길 것인가 ? 김현주 씨와 메지니 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한편의 번역시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 독자들이 이 번역시를 읽고 우리와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 우리는 늘 이런 질문 속에서 번역을 진행시켜야 한다. 번역시는 언어적으로 그 의미가 분명해야 하고, 앞뒤 맥락에 껄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즉각적인 설득력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두 텍스트 사이에 관련성은 탈색되고, 번역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운명을 지닌 채 독자 앞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개 그 함정에 빠지고 마는 단어 대 단어의 번역, 즉 코드 전환 식 번역은 불어를 모국어로 하는 자의 시선에 번역시의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텍스트에서, 두 나라의 문화와 언어 습관의 차이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다른 시편들에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피리를 불면」에서 “이슬에 함초롬 / 젖은 풀잎”을 원시의 문장 구조 그대로 번역해 놓았는데, 불시에서는 이 두 행이 과연 문법적으로 어디에 걸리는지 매우 불투명해진다. 즉, 지훈 시에 보이는 수많은 이런 종류의 명사구를 그대로 명사구로 번역한 것은 분명 오류이다. 미완성된 자체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시의 호흡 속에서 어우러져 있는 이런 시행들은 프랑스 시로 전환될 때는 전체 맥락 속에서 정확하게 그 문법적 정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 두 개의 연의 끝에 쉼표를 넣었고(둘째 연에서 실은 문장은 끝나고 있다) 연이어, 이 명사구를 그대로 번역한 후, 6번째 연에서 “내 가슴에 넘치는 / 차고 흰 구름”이라는 명사구를 또 다시 명사구로 번역하고 마침표를 넣었다. 과연 이 전체 문장들의 구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독자들이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위에서 먼저 인용된 두 행은 그 다음에 나오는 “달빛도 푸른 채로 / 산을 넘는데”와 함께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 ‘풀잎은 함초롬 이슬에 젖어 있고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달빛도”의 ‘도’가 존재할 수 있는데, 번역에서는 명사구에 대한 적절한 번역 없이 그냥 “La lune aussi”라고 했기 때문에 불어로 읽는 독자들은 “aussi"의 정당성을 알 수 없게 된다. 조지훈 시에 종종 나오는 이 “……도”를 무조건 “……aussi”라고 옮겨버린 것은 직역의 폐해일 것이다. “푸른 채로”를 “dans sa robe bleuté”로 한 것이나, “달이 산을 넘는다”를 “La lune enjambe la montagne”로 옮긴 것 등도 모두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차고 흰 구름”에 해당되는 “Nuage froid et blanc”에서 “Nuage”가 “froid” 하다는 것은 불시에서 시적인 힘을 잃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 번역서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다. 「고사 2」의 “물에 씻은 듯이 조약돌 빛나고”에서 그 조약돌은 그만큼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혹은 개울물에서 바로 건져 올린 그 물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돌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아니, 시 전체를 읽어보면, 여기에 개울이 있고, 따라서 이 조약돌은 개울물 속 혹은 물가에 있는 자연의 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le gravier comme lavé à l'eau”라고 번역한 것은 불어 자체로 보나 시의 전언이라는 면에서나 모두 만족할 수 없는 번역이다.
이런 면에서 『학』이 번역시의 때를 벗고 완전한 불시들의 모음집으로 읽힐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적 정서에 바탕을 둔 시인의 작품 번역은 그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보다 현대적이며 보다 보편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인간의 고민과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독자의 혼을 일깨워주려는 중견시인들 혹은 젊은 시인들을 찾아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동시대의 시가 담고 있는 한국의 정신적 깊이를 서구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생각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