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 리뷰
유소년기의 정체성을 관찰한 독일 최초의 심리소설 -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

  • 번역서 리뷰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유소년기의 정체성을 관찰한 독일 최초의 심리소설 -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

 
  독일 문학은 18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세계문학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이나 프랑스 문학과 비교해볼 때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특히 독일 문학은 젊은 괴테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문학의 지축을 뒤흔드는 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독일 문학사에서는 이러한 괴테의 소설과 똑같이 중요한 작품으로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를 꼽고 있다. 괴테의 소설 『베르테르』가 청년기의 이상과 고뇌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라면,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는 주인공 안톤이 유소년시절을 거쳐 청년기에 막 접어드는 시기까지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을 예리한 관찰을 통해 엮어낸 정체성의 형성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문학사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소설 『안톤 라이저』를 독일 최초의 심리소설로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작품이 오늘에야 국내에 번역․출간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기는 하나,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독일 문학이 지닌 다양성과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한국 소설계에 신선한 자극으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현대인의 정체성의 문제가 벌써 이백년 전, 독일의 한 작가에 의해 예리하게 다각도로 관찰․분석되었기에, 그리고 문학이 심리학과 만남으로써 문학적 풍요로움을 한껏 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전범(典範)이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완성된 심리학적 해부도이자, 정신병리학적 보고서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들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현실세계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에 우리의 주목을 더욱 끈다.

  이 번역작품을 통해 상기의 이러한 점들이 잘 살아나고 있어 흐뭇한 마음이다. 특히 직역을 피하고 되도록 잘 읽히며, 소설의 주제와 문제의식이 확연해지도록 애쓴 번역자의 수고와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소설의 주제와 맞닿는 부분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5쪽 끝 부분부터 16쪽으로 이어지는 묘사는 어린 안톤이 이미 유아기적부터 경험하게 되는 동일성 형성에 관한 부정적인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심리학에서는 동일성의 형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6세 이전에 이미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기를 돌보아주는 인물과 동일시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부모가 이러한 자기동일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동일성의 경험에 실패하는 안톤의 유아기적 성장과정을 모리츠는 소설의 처음에서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보다는, 부모 중 누군가를 닮고 싶어하는 안톤의 유아기적 욕구가 살아나는 번역이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부모 모두가 서로를 증오하는 환경 속에서 아이는 그 어느 누구와도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이러한 주위 인물과의 첫 경험은 앞으로의 대인관계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심리적 기전(機展)을 형성하게 된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원문 “da sich beide haßten”에 해당하는 번역은 완전히 빠져있어 아쉽다. 이외에 키워드의 번역, 예를 들어 “Herz”와 “Seele”는 “가슴”과 “마음”과 “영혼” 가운데 안톤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의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번역하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장편의 소설을 원작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무리없이 완역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그야말로 옥에 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 『안톤 라이저』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200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 세계문학총서’로 출간되었다.
전창배
글 / 전창배_중앙대 독어학과 교수. 1954년생. 저서 『Gestörte Identitätsbildung』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