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초원의 빛, 꽃의 영광 - ‘한․몽 시인대회’ 참가와 몽골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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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초원의 빛, 꽃의 영광 - ‘한․몽 시인대회’ 참가와 몽골 기행

   몽골하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과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맡았던 진한 허브 향기, 그리고 드넓은 초원을 가로가르던 전봇대의 전선, 석양을 배경으로 그 전선 외줄 위에 앉아 있던 유난히 통통하게 살찐 몽골참새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순박하던 주민들의 모습도.

  지난 8월 21일부터 28일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몽골에서 ‘제 9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다. 한국측의 공식 대표는 작가회의 부이사장인 이시영 시인, 상임이사 고형렬 시인, 시분과위원장 박영근 시인, 감사이자 대구지회장인 필자, 사무국장인 소설가 한창훈 등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여기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인 소설가 유시춘 선생, 문예진흥원 사무총장 강형철 시인, 김형수 시인, 부산 거주 작가회의 회원 전성호 시인, 순천 거주 회원 김청미 시인, 책만드는집 대표 김정순 씨 등 모두 열한 명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몽골국립비행기(미아트)에 몸을 실었다.

  ‘2003 한․몽 시인대회’는 ‘대지를 노래한다’는 주제로 7일간 열렸다. 북방문화의 거점인 몽골과 교류를 통해 남방의 농경문화와 북방문화가 접합된 우리 문화의 미학적 정체성을 찾고 아시아 문화와 교류를 시작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인 셈이다. 실제로 작가회의는 남방문화권의 중심인 베트남과 교류를 시작한 바도 있다.

  21일 당일 아침 나는 대구에서 김포로 향하는 7시 첫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기까지는 사실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2003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렸는데 북한의 미녀 응원단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서울의 한 일간지에게서 이번 U대회 기간 보름 동안 미녀응원단과 함께하면서 취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몽골작가대회 참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동행취재가 어렵다는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신문사 담당자로부터 몽골은 내년에도 갈 수 있지만 대구 U대회는 평생 한 번뿐이고 미녀응원단 취재 또한 평생 오기 어려운 기회이니 잘 생각해 보라는 은근한 강권을 받은 터였다.

  평소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후진국(?) 여행에서 부딪치게 될 불편함 같은 게 싫었기 때문에 에라 모른 척하고 U대회 취재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소 몽골에 대해 갖고 있던 어떤 근원적인 친밀감, 공식적인 국제대회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결국 비행기에 몸을 얹었다.

  인천공항에서 몽골 울란바토르 공항까지는 세 시간 남짓 날아갔다. 기내에서 전성호 시인이 준비해 온 몽골 관련 자료를 얻어 보았다. 국명은 몽골이고 공식 명칭은 몽골리아로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인구는 2백40여만명(97년 기준)이고 이 가운데 68만이 수도에 살고 있다. 국토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있으며 중앙아시아의 심장으로 총 면적은 한국의 17배, 국토의 90%가 목초지․사막․산이며 10%가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력한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10월 중순에서 3월까지로 길고 여름은 7~8월로 짧다. 인구의 94% 정도가 티벳불교인 라마교와 미신을 믿고, 6%가 이슬람을 믿고 있다. 언어는 90% 이상이 몽골어를 사용한다는 정도의 정보를 눈으로 건성건성 읽었다.

  기내 한켠에서 약간의 탄성이 일어났다. 나도 얼른 창밖을 내다보니 몽골의 상공을 날고 있는지 창밖으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마치 녹색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 부드러운 그린이 한없이 펼쳐져 있고 푸른 도화지에 연필로 금을 그어 놓은 것 같은 가는 실선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아득하게 이어져 있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 인간이 만든 문명의 실핏줄이었다.

  공항에는 몽골작가동맹(Writer's Union) 대표와 사무국 직원 등 몇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피스브릿지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일정이 시작되었다. 첫번째 방문지는 울란바토르 시 외곽에 있는 몽골전승탑이었다. 이 탑은 1937년 일본제국주의 침입을 물리친 몽골인들의 자부심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얕은 민둥산 위에 위치한 이 탑에서 내려다 본 울란바토르 도심을 향해 누군가가 1960년대 후반의 광주시 전경 같다고 했다. 나도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니 내가 중학교를 다녔던 70년대 초반의 경북 안동 시내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실제로 몽골은 개발 정도가 우리나라보다 30년 정도 늦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를 안내한 몽골작가동맹 대표는 예상밖으로 젊은이었다. 나이가 서른 여덟이라니. 콧수염을 기르고 몽골 전통의상을 입은 나이 든 몽골 사람을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나로서는 약간 실망했다. 알고 보니 나이든 원로 문인도 많았지만 몽골작가동맹도 세대 교체의 와중에 있어서 원로들은 뒤로 물러나고 실제 업무는 젊은측이 맡고 있었다. 문학도 전통적인 사회주의리얼리즘이 퇴조하고 젊은이들 중심의 모더니즘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첫날 한․몽 시인대회에서 이시영 시인이 「새로운 문명의 ‘초원길’을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대회사를 했고, 한국 시인과 몽골 시인 수 명이 각각 시를 낭송했다. 몽골 시인의 시 낭송은 독특한 운율이 있어 구비문학의 전통이 아직까지 강하게 남아 있음을 실감했다.

  몽골에서는 가장 고급 호텔에 속하는 피스브릿지호텔에서 룸 동료인 이시영 시인이 내게 “야 의성(내 고향 경북) 변두리 낡은 장여관같지” 라는 조크를 귓전에 흘리며 첫날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옥상에서 시내 중심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봤다. 사방 눈에 띄는 건축 크레인이 열세 대나 부지런이 움직이며 건축 자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막 개발의 심장이 약동하기 시작하는 도시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맑은 하늘, 푸른 초원을 개발의 아수라 속으로 끌고 가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거리에는 한국에서는 이미 단종이나 폐차가 된 차종과 일제 중고차가 투덜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틀간의 시내 일정을 마치고 한국 문인 열한 명과 몽골문인 열네 명이 승용차를 빌려 드디어 초원 탐방에 나섰다. 당초 계획은 고비사막을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정을 변경하여 징기스칸이 태어난 징기스칸의 고향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김형수 시인이 초원 탐방의 안내자가 되었다. 이미 몽골 전문가가 된 김 시인의 해박한 지식에 몽골 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승용차는 시속 40킬로미터 안팎의 속도로 하루 종일 지평선만 보이는 앞을 향해 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광활한 초원만이 눈 앞에 펼쳐졌다. 산도 나무도 없었다. 오로지 녹색의 초원과 푸른 하늘만이 전부였다. 가끔씩 ‘게르’라고 불리는 몽골의 전통 천막집과 양떼들만이 하나의 점으로 솟아올랐다가 아련히 사라질 뿐이었다. 광활한 대지와 옥빛 하늘은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하나의 심연이었고 우주의 근원에 대한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떤 까닭모를 슬픔 같은 감정이 내 이성을 압도했다.

  대구나 서울 같은 문명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승용차에서 지하철, 휴대폰에서 인터넷으로 연결된 생지옥 같은 생활에서 나는 어떻게 견뎌 왔는가, 아니 어떻게 더 잘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던가 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함께 밀려왔다.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출발한 여로는 밤 12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징기스칸기념관 곁에 몇 채의 게르를 모아놓은 일종의 외국인 여행객 전용 숙박촌이었다. 열네댓 시간을 꼬박 길도 없는 초원을 달려온 셈이다. 한 2백킬로미터 정도를 탔나, 전신이 아프고 결렸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게르 하나씩을 배정받아 잠자리에 들었다. 8월 말이지만 한국 기후로 치면 10월 말쯤 되는데 천막 속에서 허술한 옷차림으로 잤으니 너무 추워서 얼어 죽는 줄만 알았다.

  이튿날 아침 10시 경에 일어나 아침 식사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징기스칸기념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인근에 있는 유목민들에게 말 몇 필을 빌려오고 낙타도 빌려왔다. 낙타를 타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말을 타고 숙소 주위에서 간단한 승마도 했다. 숙소에서 2킬로미터 쯤 떨어진 기념관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발생했다.

  소설가 한창훈 씨가 타고가던 말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한 씨가 낙마해서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약사 출신인 김청미 시인의 간호가 빛을 발했다. 함께 간 몽골 문인 중 좌장격에 속하는 분이(안타깝게도 몽골 문인들이나 지명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지 않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장군”이라고 말했다. 나는 노시인의 이 말에서 유목민들의 세계관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말타기가 일상인 이들에게 낙마 부상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죽지 않으면 장군이라는 용기있는 언어로 몽골인들은 스스로를 장군으로 만들어 간 것이다. 그 전통이 13세기 징기스칸의 대제국 건설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또 노시인은 일행 모두를 자신의 게르로 불러 모은 뒤 숙연한 낯빛으로 한 씨가 다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했고, 한 씨가 다친 것은 우리 일행 모두가 다친 것이고 모두가 아픈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아마 좌장으로서 일행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한 사람이 아픈 것이 모두가 아픈 것이라는, 물여일체적이고 타자를 포용하는 우주친화적인 태도는 몽골인들의 오랜 세계관인 듯 했다. 광활한 대지 위에서 오늘 잠시 만났다 스쳐지나는 나그네를 그들은 가장 반가워한다. 그리고 낙관적이고 모든 게 느리다. 이들의 느림 속에서 새로운 세기의 빛을 본다. 그게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일지 모른다.




김용락
글 / 김용락_시인. 1959년생. 시집 『푸른별』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