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는 강화도에 딸린 석모도(席毛島)에 있다. 오늘날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다. 석모도는 예전의 지도에는 석모로도(席毛老島)로 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보문사는 매음도(煤音島)에 있다고 해야 옳다. 매음도와 석모도는 연결되어 있는 섬인데 지금은 석모도로 통합되었다. 크기를 따지면 석모도의 둘레는 40리요, 매음도는 60리니, 큰 섬이 작은 섬에 먹힌 셈이다. 매음도는 구음도(仇音島)라고도 하였다. ‘구음(仇音)’이나 ‘매음(煤音)’이 우리말 ‘그을음’에 해당하니 그을음섬인 셈이지만 왜 그러한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절은 신라 성덕여왕 때 창건되었다. 이곳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마치 인형처럼 생긴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가 도로 바다에 던져버렸지만 다시 걸려 올라오기를 두어차례 하였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건져 올려 명산에 잘 모시라고 당부하였다. 어부는 다음 날 22개의 돌을 다시 건져 올려 옮기는데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들 수가 없어 단을 만들고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보문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석모도의 보문사를 찾는 일은 비교적 간편하다. 강화도의 외포리로 가서 그곳에서 페리호를 타면 된다. 승용차까지 태워도 되니 편리한 세상이다. 예전에도 강화도까지야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지만, 석모도는 그렇지 않았다. 130여년 전에는 매음도와 석모도를 합하여 어업에 종사하는 1천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 살았을 뿐이며, 글줄이나 하는 선비들이 이곳을 찾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기이한 산과 물이 있다면 멀고 험한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산수(山水)의 벽(癖)을 가진 매니아가 있었다. 이하곤(李夏坤, 1667~1724)이 그러한 사람이다. 이하곤은 자가 재대(載大), 호가 담헌(澹軒)이며, 소금산초(小金山樵), 무우자(無憂子) 등의 호도 썼고, 그의 문집이 두타초(頭陀草)이니 두타(頭陀)라는 호도 썼을 것이다. 본관은 경주로 증조가 이시발(李時發)이며, 조부가 이경억(李慶億), 부친이 이인엽(李寅燁)인데 삼대가 판서를 지낸 명문이다. 영의정에까지 오른 최석정(崔錫鼎)이 그의 고모부다. 그 자신은 송상기(宋相琦)의 딸과 혼인하였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사람이다. 게다가 스승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김창협(金昌協)이었다. 그럼에도 이하곤은 산수의 벽이 깊어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아 진천(鎭川)의 금계(金溪)에 물러나 살며, 증조부 이시발로부터 이어받은 수천권의 서적에 자신이 구한 것을 합하여 만권루(萬卷樓)를 경영하면서 독서로 평생을 보내었다.
이하곤이 강화도로 간 것은 부친 이인엽이 1704년 2월 강화유수(江華留守)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당시 강화유수는 매우 높고 중요한 자리였다. 이인엽은 이미 판서와 대사헌을 지내고 이 자리에 임명되었으니 장관급의 벼슬인 셈이다. 28세의 이하곤은 부친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다. 강화도에 살면서 이하곤은 봉상포(鳳翔浦), 정족산성(鼎足山城)과 전등사(傳燈寺), 적석사(積石寺) 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숙종 31년(1705) 3월 23일 소문으로 듣던 보문사로 향하였다. 이제 그와 함께 보문사로 가보자.
이하곤은 경력(經歷) 벼슬을 하던 임정(林淨), 종형(從兄) 이재방(李載方), 막내 재창(載昌), 재종형 택경(澤卿) 등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하곤은 먼저 강화부(江華府)의 서문(西門)을 나서 적석사(積石寺)로 향하였다. 적석사는 내가면에 있는 고려산(高麗山)에 있는 사찰이다. 산이름이 고려산이거니와, 고려시대 선원사(禪源寺)에서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여 이 절에 봉안했다고도 하며, 원(元)이 침입하였을 때 임금이 잠시 머물기도 한 유서깊은 곳이다.
이하곤은 안응정(安應貞)이라는 벗과 함께 가기 위해서 적석사에서 남쪽으로 20여 리를 갔다. 안응정은 집 앞 버드나무 그늘 아래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집 주위에는 소나무, 느릅나무, 잣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서 있어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합(黃蛤)에 탁주를 내어오기에 개울가에서 목을 축였다.
이에 함께 매음도로 갈 배를 타려고 정포진(井浦津)으로 갔다. 정포진은 당시 매음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타던 곳인데, 지금 석모도로 갈 때 배를 타는 외포리 선착장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다. 이하곤이 정포진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아전이 배를 준비하지 않아 만호(萬戶)의 관아 마루에서 점심을 먹었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배를 띄웠다.
저물녘 배를 띄워 매음도(煤音島)로 향하였다. 바람이 일어 파도가 쳤다. 배가 날듯이 갔다. 떨어지는 저녁햇살이 바다 입구에 가로로 뻗쳐 있어 노을이 모두 붉어졌다. 바다 한가운데서 둘러보니 교동도(喬桐島), 철곶(鐵串) 등 여러 진(鎭)의 초루(譙樓)와 성곽의 성가퀴들이 구불구불 비뚤비뚤 뻗어 있었다. 수백 마리의 흰 뱀이 꿈틀거리면서 몸을 굽혀 물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박모(薄暮)에 섬에 이르렀다. 배를 버리고 말을 타고 7~8리를 가니 산길이 매우 험하였다. 어지러운 바위들이 험준하여 열 걸음에 한 번은 넘어질 정도였다. 다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노루고개(獐項嶺)에 올랐다. 하늘이 깜깜해져 있었다. 노루고개 마루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바다가 희끄무레하여 수만평의 구름이 펼쳐진 듯 아득하였다. 별들이 반짝반짝 하늘 끝에서 빛을 드리우고 있는데 조수(潮水)가 밀려드는 소리가 막 들렸다. 평생 제일의 기이한 경관이었다. 저 중국의 이름난 문인 소동파(蘇東坡)와 같은 필력이나 원굉도(袁宏道)와 같은 날랜 재주가 없어 기록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
숲 속을 살펴보니 불빛이 마치 반딧불이 떼와 같이 반짝반짝하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흡연장로(翕然長老)가 우리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절의 중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것이었다. 나무그늘 속으로 1리쯤 가니 절이 나왔다. 밤이 이미 깊어 북이 한 번 울렸다. 급히 이른바 석굴이라 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절 서쪽 100여 보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신통굴(神通窟)이라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을 가지고 와 인도해 들어가게 하였다. 앞부분이 오목하게 마치 문처럼 생겼는데,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선생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었다.
몇 걸음을 가니 동쪽에 작은 샘물이 시원하게 바위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빛이 투명하고 맛이 매우 달았다. 승려들은 샘에 신령이 있어 영험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또 앞으로 수십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책상이나 종과 솥처럼 늘어서 있었다. 이로부터 동굴이 점점 낮아져서 천장에서 땅까지 불과 4~5척밖에 되지 않아 손으로 천장을 만질 수 있었다. 몸을 구부린 다음에 나아갔다. 그 곁에 구멍 수십 개가 있는데 우묵하면서도 영롱하였다. 벌집이나 연근을 잘라놓은 구멍처럼 생겼는데 바람이 그 안에서 나왔다. 마치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는 소리 같았다. 기운이 음산하여 모발이 오싹하였다. 동서의 거리는 거의 1백궁(弓)인데 남북 방향은 그 배가 되었다. 5천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서쪽으로 십팔나한(十八羅漢)을 안치해 놓은 곳이 있었다. 승려들이 담벼락을 쌓고 창을 내어 완전히 하나의 방처럼 만들었다. 매우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다.
이날 밤 흡장로의 방에서 잤다. 등불이 훤한데 서로 바라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산들바람이 때때로 불었다. 처마 사이에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인간 세상을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 이하곤의 「보문암을 유람한 글(遊普門庵記)」
이하곤은 한밤중에 보문사에 도착하였지만, 평소 석굴을 보고 싶던 마음에 다음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석굴을 찾았다. 석굴의 기이함도 기이함이려니와, 그곳에서 스승 김창협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았으니 참으로 반가웠으리라. 등불을 들고 들어가 석굴의 이모저모를 다 보고 나와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맑은 풍경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로 어떻다고 할 수는 없다. 이날 이하곤은 신선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이하곤은 다음날 아침밥 먹지 않고 다시 석굴 위쪽으로 올라가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거울처럼 맑았다. 대여섯 개의 섬이 이곳저곳에 떠 있는데, 이하곤의 눈에는 마치 미인(美人)이 쪽을 찌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위쪽에는 배바위(船巖)가 있다. 속은 우묵하고 끝은 예리한데 돌이 그 끝에 붙어 있어 갈매기 꼬리처럼 생겼다. 이하곤은 다시 더 위로 올라갔다. 돌길이 가팔라 칡넝쿨을 잡고 몇 백 걸음 가니 큰 돌이 포개져 몇 백 자 높이로 된 것이 보였다. 그 위에 다시 돌이 지붕처럼 덮고 있으며 처마를 드리워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치마바위(裳巖)라 부르던 것이다. 이하곤이 여인의 치마 밑에 들어가자니 민망했다. 그래서 아예 이름을 석문(石門)이라 고쳐버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산수에서 노닌 자취를 남기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아름다운 곳의 바위에는 옛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문사 석굴에도 이하곤의 스승 김창협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하곤 역시 자신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바위면이 깎은 듯 날카로워 발을 붙일 수 없었다. 하인 몇을 불러 비늘처럼 늘어세우고 그 어깨를 밟고 이렇게 썼다.
경주(慶州) 이씨(李氏) 이하곤(李夏坤), 이명곤(李明坤), 이윤곤(李潤坤), 광릉(廣陵) 안씨(安氏) 안응정(安應貞)이 을유년(乙酉年) 3월 23일 보문암에 들러 신통굴을 보고 하룻밤 자고 돌아간다. 수행한 사람은 김석문(金錫文) 이동석(李東晳) 지인(知印) 성갑(聖甲) 시영(時英) 효섬(孝暹) 한명(漢明)이며, 하인은 쌍동(双同)이다(鷄林李夏坤李明坤李潤坤廣陵安應貞乙酉三月 二十三日過普門庵觀神通窟一宿而歸從者金錫文李東晳知印聖甲時英孝暹漢明隸人双同也)
같이 보문사를 찾은 사람 중에 임정과 이재방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을 꺼려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인들의 어깨를 밟고 이렇게 길게 쓰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이하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시 한 수를 더 썼다.
서늘한 바위굴 안이 텅 비어 있는데
푸른 이끼의 기이한 무늬가 새 발자국 같구나.
한 번 웃는 벼랑 틈의 꽃을 꼭 기억해야 하리니
은근히 바위와 구름을 쓸면서 글을 쓰노라.
泠泠巖窟內通虛 蒼蘚奇文鳥跡餘
一笑崖花須記取 殷勤掃石和雲書
이렇게 하고서야 시장기를 느끼고 절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종밀(宗密)이 쓴 원각경(圓覺經) 서문을 읽었다. 점심에 유화이(油花餌)라는 색다른 음식을 먹고 강화도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배를 타고 황청포(黃淸浦)에서 내려 적석사로 가서 하룻밤을 더 자고 다음 날 비를 맞으며 강화부로 들어갔다.
이하곤이 보문사를 찾은지 3백년이 되었다. 보문사야 옛모습이 아니겠지만, 산과 물이야 어디로 갔겠는가? 혹 그 산과 그 물이 아닐지라도 옛사람의 글과 함께 찾아보고 해가 지는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사람답게 사는 맛이 나지 않겠는가?
- 이종묵
- 글 / 이종묵_서울대 국문과 교수. 1961년생. 저서『한국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해동강서시파연구』, 편역서 『누워서 노니는 산수』『부휴자담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