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임을 깨닫고 밥그릇을 연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이밥 속에도 얌전이는 있다. 고사리나물 위에도 있다. 조기 토막 위에도 있다. 눈이 가는 곳마다 얌전이는 있다. 성눌은 정신을 깨닫는다. 마지막 넘어가는 해그림자가 불그레하게 밥상 위에 물을 들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뿐이다. 얌전이는 그대로 있다. 숭늉에다 밥을 말아 뜨니 밥숟갈 위에까지도 얌전이는 떠올라 온다. “상 가져가거라.” 실로 성눌은 얌전이가 차마 그리워 이렇게 밥숟갈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소리를 질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곧 달려온 얌전이는 떠 넣었던 밥을 채 씹어 삼키지도 못한 것 같이,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비밀히 처리하려는 것처럼 입 안을 꼭 다물었다.
- 계용묵 「유앵기」
그만 일어서려는데 술상이 나왔다. 소반에, 내가 가지고 간 닭고기와 깍두기와 밤대추가 놓여져 있었다. 김구장은 석 잔인가 마시더니 자기는 그만두겠다고 하면서 나한테만 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구장의 낯에 술기운이 오른 것도 아니었다. 홀기계로 바투 깎은 머리에 면도자국이 파란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갑게 윤을 내고 있었다. 그런 웃어른 앞에서 나 혼자 술을 받아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추만 씹었다. 저번 와서 먹을 때보다도 더 쇠들쇠들 마른 게 사뭇 달고 맛있었다. 대추 종류가 참 좋다고 했더니 김구장은 선친이 제사 때 쓰려고 심은 거라고 했다.
- 황순원 「내 고향 사람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탐욕스런 광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중국인들의 얼굴. 무엇이든 먹어버리는 중국인들의 식성. 중국의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동물로 요리된 음식을 먹었었다. 통째로 삶은 개구리, 튀겨 나온 전갈, 당나귀의 붉은 살코기, 뱀, 자라고기, 박쥐의 귀, 그 유명하다는 살아 있는 원숭이의 두개골을 망치로 부숴 내고 드러난 원숭이의 골을 숟갈로 떠먹는다는 원숭이 요리만을 제외하고 나는 온갖 요리들을 다 먹었었다. 아마도 그들은 저런 쥐도 잡아서 털을 벗기고 기름에 삶고 튀겨 먹어버릴 것이다. 살아 있는 동물, 움직이는 곤충, 날아다니는 그 모든 새, 심지어는 모기의 눈알까지 살아 있는 짐승이면 무엇이든 먹어버리는 중국인들. 그들은 그 짐승들을 요리하여 먹음으로써 동물과 일치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무서운 짐승에게서도, 흉칙하게 생긴 파충류에게서도 전혀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그런 짐승과 새, 곤충들은 다만 식욕을 돋우는 음식의 재료일 뿐인 것이다.
- 최인호 「북경의 밤」
편집자 주) 동덕여대 조병무 교수는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각종 대상과 행위 묘사를 ‘사랑과 성’, ‘인물’, ‘무대․장소’, ‘직업․집회’, ‘자연․서정’ 등 유형별로 분류해 총 6권의 『소설 묘사 사전』을 펴냈다. 위 인용문은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