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관계’, 그리고 위험하지 않은 ‘스캔들’ - 소설 『위험한 관계』와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원작 대 영화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위험한 관계’, 그리고 위험하지 않은 ‘스캔들’ - 소설 『위험한 관계』와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인쇄매체를 원전으로 하는 영화를 볼 때 흔히 겪게 되는 일이지만, 스크린 너머에 희미하게 깔려 있는 원전의 흔적들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10월 초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과 “통”하고 있는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표된 라클로(Laclos)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각색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 직전 귀족사회의 사치스럽고도 부패한 사랑 게임을 냉정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주인공 메르테유 후작 부인이 멀어진 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역시 옛 애인인 희대의 바람둥이 발몽을 이용해서 주위의 여러 남녀의 연애 심리를 조종하는 것을 기본 줄기로 한다. 다분히 사디스트적인 이 남녀는 악마적 간계와 음모에 몰두하고, 사랑과 배신, 진실과 거짓말, 그리고 음모와 파멸이 이어진다. 한 마디로 『위험한 관계』는 “사랑의 환상”을 조롱하며 “욕망의 현실”을 날 것으로 보여준다. 욕망이란 어차피 목표물이 없기에,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장애물을 만나서 욕망이 불타오른다기보다는, 불타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장애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욕망이다. 이렇게 사랑이 아니라 욕망의 유희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는 위험하며, 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반면 사랑의 관계는 환상을 깔고 있기에 위험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기에 매력적이 아니다(그래서 여러 인물이 주고받는 편지의 형식을 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가 없는 부분은 당스니와 세실이라는 두 젊은이가 주고받는 사랑 편지다). 여기서 인물들간의 위험한 관계가 더욱 흡인력을 갖는 것은 편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각기 자기의 시점과 욕망에 따라 세계와 타인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며, 결국 퍼즐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 주어진 편지들을 엮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위험한 관계』의 독서는 또 하나의 위험한 게임이 된다.
영화 <스캔들>은 무대를 조선시대로 옮겨서 상황을 조금 다르게 설정하지만(예를 들어 조씨부인의 복수대상은 나이 어린 소실을 얻으려는 남편이고, 젊은 시절 연정을 품었던 사촌동생 조원의 힘을 빈다), 원작의 인물들은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기세를 떨치던 조선시대라는 새로운 틀 안으로 무리없이 옮겨간다. 사실 “스캔들”이라는 외래 단어와 “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의고적(擬古的)인 단어의 다분히 의도적인 불협화음부터가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를 조선의 양반사회로 슬며시 옮겨놓는 데 기여하지 않는가? (중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03년 겨울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윤진
글 / 윤진_번역가, 아주대 강사. 1961년생. 역서 『자서전의 규약』 『거울의 역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