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초기부터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류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 왔다. 그것이 바로 언어가 발달하게 된 경위이며 이유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게 되면 그것이 없을 때에도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사물을 가리키며 ‘저기 저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호랑이’라고만 해도 누구나 알아듣는 것이다. 일단 그것이 가능해지면 그 이상의 것, 즉 호랑이에 대한 유용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게 된다. 그러면 다른 단어, 다른 종류의 단어가 필요하게 되고, 호랑이가 잔다던가, 가버렸다던가, 추장을 잡아먹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게 된다.
호랑이가 위험하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온 부족이 그걸 알고 있고 호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경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부족의 사냥꾼이 폭풍우 속에 헤매다가 동굴로 들어와 두려워 떨면서 폭풍우가 바로 ‘호랑이’라고 말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말, 즉 바람과 비가 피부를 찢는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날카롭고 사나우며, 천둥은 언덕에 메아리치는 호랑이의 포효와 같다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냥꾼은 은유법, 즉 한가지 사물이 다른 것과 같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바로 그때 현명한 할머니가 그의 말을 듣고 있었으며 그 할머니는 폭풍우가 칠 때 동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경고하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는 폭풍우-신이 잡아먹을 아이들을 찾는 호랑이처럼 언덕을 넘어온단다. 그의 눈은 번개와 같은 불이지만 그의 숨결은 차갑고 무서우며 그가 올 때 나뭇잎들도 두려워 떨고 작은 동물들은 구멍에 숨는단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동굴에 숨어야 해.” 이런 식으로 그녀는 말로 하는 묘사, 예화, 그림을 고안해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혹은 바보처럼 만용을 부려서 폭풍우를 만나게 되고 동굴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누이는 그것을 기억하게 되고 그녀가 현명한 노파가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옛날에 내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자기보다 현명한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멍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면 안되는 날 밖으로 나갔어. 폭풍우-호랑이의 숨결이 컴컴하고 화난 구름으로 하늘에 몰아치고 있었으며, 그 목소리는 우르렁거리며 언덕에 울려 퍼졌고, 부족의 용감한 사냥꾼들도 그날은 동굴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내 동생 멍청이는 밖으로 나가 숲에서 폭풍우-호랑이를 만났어. 그는 나뭇잎을 스치며 그것이 다가 오는 것을 들었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온통 휩쓸려서 이리저리 몰려가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그는 창을 들고 여기 저기를 막 찔러댔어. 하지만 호랑이 줄무늬 때문에 숲에 가려져서 불쌍한 멍청이는 어디를 찔러야 할지를 몰랐고 창으로 아무 것도 건드릴 수 없었어. 그때 그는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이 자기를 물어뜯는 것을 느꼈고 그가 창을 놓고 울면서 쓰러지자 호랑이는 그를 먹어치웠지. 우리는 그의 뼈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어.
이렇게 해서 그녀는 다른 사건의 결과로, 우리의 행동 때문에, 행동과 결과로 사건이 일어나는 내러티브라는 것을 발명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러티브에 예화와 은유를 섞었고 그녀가 한 일은 어떤 인간이 한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이야기하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그녀는 또 판타지도 만들어 냈다. 왜냐하면 폭풍우-호랑이라는 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야기는 엄격히 사실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되며, 진실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만 하면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내가 방금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기술을 발명한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진짜가 아니고 내가 지어 낸 것이다. 어느 날 불가에 손자들을 둘러 앉히고 자기 동생 멍청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여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행위를 한 사람들, 세상과 위험에 대해 서로에게 말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둠을 두려워하라고, 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도움을 구하라고 가르쳐 준다. 이야기는 신뢰의 가치, 믿음이 배신당할 때의 슬픔도 가르쳐준다. 이 모든 것은 인생과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교훈이 경험에 의해 강화되기 훨씬 전에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배운다. 어른들의 책에서는 그 교훈이 훨씬 복잡하고 명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종종 그렇지 않은 책이 훨씬 더 좋다. 어린이를 위한 글에서는 분명하고 간단하게 쓸 수가 있다. 아이들은 훨씬 더 너그럽다. 러드야드 키플링의 『정글의 법칙』은 야생동물을 위한, 늑대와 곰, 자칼과 코끼리와 호랑이가 자신과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한 규칙 체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아이에게 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 아이들의 머리 속에서 매일 약간씩 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목적이며 아이들은 그것을 우리만큼 잘 안다.
물론 키플링의 『정글북』은 판타지이다. 그 책은 실제 인도와 인도 동물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키플링의 동물은 진짜 동물들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조와 질서를 갖춘 사회가 있으며,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매우 인간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지키거나 깨뜨리기를 선택하는 법이 있다. 대부분의 어린이용 도서는 옛날 동화에서부터 최근의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 판타지이며, 왜 그런 판타지가 되어야 하는가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당신이 만약 아이에게 “너희들 이웃 동네 패거리하고 싸우면 안돼”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그말을 무시할 것이다. 이리떼는 다른 이리떼하고 싸우지 않는다고 애들에게 말하고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입증할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들은 이리처럼 생각하고 이리떼 놀이를 하느라 싸우지 않으면서 하루를 보낼 것이다. 판타지는 그들이 훨씬 행복해지는 세계로 데려다 준다. 판타지는 아이들에게 파워와 힘을 주고 그들의 자아상을 만족시켜 그 이미지가 현실화되게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싸움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믿거나 적어도 그렇게 상상을 하며, 따라서 그들은 싸우지 않게 되며 강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아이에게 어둠 속에 도사린 위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동굴 밖을 어슬렁거리는 호랑이이건 도시의 거리를 다니는 나쁜 영혼이건 폭탄을 싣고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이건 간에 아이들은 심하게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해로운 상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판타지를 이야기한다면, 옛날 호랑이의 유령이나 도시의 사악한 아이 납치범, 혹은 하늘의 화룡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조심을 하면서 혼자서 어두운 데 나가지 않겠지만 공포에 질리지는 않을 것이며 이야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이야기이고 판타지이며 실제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실제적인 것과 진실한 것의 차이를 안다. 그들은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는 것처럼 유령이나 아이 납치범이나 용을 믿지 않는다. 진짜 믿지는 않는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이야기이며 그건 부모들이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것들도 이야기이며 어두울 때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들이 믿는 건 바로 그것이며 그것만 믿으면 된다. 유령이나 용은 교훈을 걸기 위한 고리이다.
어떤 사실에 대해 분명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이 진실인 것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나는 물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교훈으로 이야기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그중에서도 판타지는 가장 재미있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1960년대에 옥스퍼드에서 자라났다. 누나는 내가 세 살 때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 후 나는 1백년 동안 책을 읽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마법에 걸린 소년과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책을 집어드는 것이었고 밤에 마지막 하는 일은 책을 놓는 것이었으며 그 사이에도 책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도 줄곧 읽었으며 학교 가는 날은 수업 중간 5분 쉬는 시간에 읽었고, 산책을 가면 책을 가지고 가서 걸으면서 읽었다. 자유시간에 나는 책 읽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동화와 전통적인 판타지, 마법사와 요정과 용이 나오는 책을 읽었다. 나는 유령 이야기와 호러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것은 판타지 장르의 하위 장르, 같은 계열에 있는 전문 분야이다. 나는 C. S. 루이스와 러드야드 키플링과 그 외 긴 목록을 읽었다. 나는 많은 동물 이야기도 읽었으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물들이 야생의 상태에서 자연적인 행위와 본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면 그 대부분의 이야기도 판타지로 취급된다.
물론 판타지가 아닌 다른 책들도 읽었다. 나는 학교 이야기와 전쟁 이야기, 그리고 손에 닿는 모든 책을 읽었다. 내 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책, 누나, 동생의 책을 읽었으며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아서 벌써 도서관의 성인용 책꽂이에서 책을 빌려오는 형의 책도 읽었다. 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형의 책은 좋았다. 그의 취향은 내 평생을 두고 그 어느 누구보다 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가 과학 소설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와 그의 독서를 통해서였고, 그후 그것은 내게 열정의 대상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처음으로 『반지의 제왕』을 읽었을 때 그것은 형의 책을 빌어서였다.
60년대에 옥스퍼드에서 자라나면서 나는 당연히 C. S. 루이스를 읽었고, 당연히 톨킨을 읽었다. 다들 그랬다. 그것은 옥스퍼드 연합을 지지하는 것과 같았고 그것은 그 지역 팀이었다. C. S. 루이스가 죽은 지는 몇 년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알려지고 기억되고 이야기되었다. 톨킨도 여전히 유행이었다. 내가 『호비트』를 읽은 것이 몇 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히 일곱 살 이상은 아니었고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렸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읽고 매혹되었다. 나는 그전 해에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보았던 막달렌 칼리지 사슴 공원에서 학생들이 연극으로 그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보았다. 야외에서, 나무 밑에서, 야생 사슴 떼가 뒤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가운데 그것을 본 것이다. 그건 마술이었다. 하지만 책이 더 좋았다. 그리고 좋은 책은, 더 좋은 책은 언제나 우리를 미지의 영역, 새로운 개념, 새로운 책 속으로 인도한다. 월드 와이드 웹을 발명한 것은 인터넷이 아니었다. 웹은 전 세계 도서관의 모든 서가에 꽂혀 있는 모든 책 속에서, 종이 위에 이미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호비트』를 읽었고 그것을 좋아했으며 2년 뒤에 형의 책꽂이에서 『반지의 제왕』을 발견했다. 그건 특정 연도와 연관되어 내 기억에 살아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드커버 책은 1950년대에 삼부작으로 출판되었지만 1968년에 최초의 페이퍼백 판이 한권으로 나왔고, 그것을 형이 샀던 것이고 그것을 내가 빌렸다. ‘빌렸다’고 나는 말한다. 그의 책장에서 빼서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바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읽기를 마치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른 것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내 책꽂이에 꽂아놓았고, 그것은 분명히 아직도 여기 있다. 그러니 그 책을 내가 훔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이 내게 속하기를 원하며 내 책이 되기를 갈망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형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진정한 사랑이었다.
12살 때까지 나는 그 책을 아마 12번은 읽었을 것이다. 그해에 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부속의 학교에 등록을 했으며 영어 선생님이었던 길 선생님은 톨킨의 단편 「햄의 농부 자일즈」를 우리가 공연할 희곡으로 각색을 했다. 그것은 농부와 용과 왕이 나오는 고전 판타지였고 나는 왕의 역할로 뽑혔다. 우리는 아이들이었고 아마 형편없었을 것이지만 우리 자신을 완전히 즐겼다. 그리고 첫날 공연이 끝났을 때 길 선생님은 백발의 작은 남자를 데리고 무대 뒤로 왔다. 선생님은 내가 분장을 지우고 있는 곳으로 그를 곧장 데리고 와서 “찰스” - 그 당시 사람들은 나를 “찰스”라고 불렀다. 이걸로 봐서 여러분들은 이게 진짜 일어난 일인줄 알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내가 좀처럼 그걸 시인하지 않으니까 - “네가 만나봐야 될 분이 여기 있다. 톨킨 교수님, 얘가 바로 찰스 브렌츨리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것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은 것 같습니다.”
정말 그분은 톨킨이었고 나는 사진과 파이프를 통해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앉아서 불을 붙이지도 않은 파이프를 가지고 법석을 떨었고 약 5분간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정말 모른다. 나는 아이들이 늘 묻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고 그는 따분한 작가의 일상적인 답변을 했을 것이지만 그건 문제가 안된다. 그로서는 또 한 사람의 열광적인 팬을 만난 것이고 다음 날 아침이면 그걸 기억조차 못할 것이며 다시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았다.
나는 서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내 심장이 뛰고 눈이 침침했으며, 흥분으로 어지럽고 메슥거려서 내가 기껏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인상이다. 12세 난 나의 눈에 그는 몸은 옥스퍼드에, 마음은 중간계에 살면서 두 세계를 동시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바로 내가 보기를 기대했던 바였기 때문에 그 인상조차 나는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실제 거기 있던 것보다는 내가 보기를 원한 것을 본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톨킨을 만났다는 것이고 그 작은 만남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큰 누나는 내가 세 살 때 읽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것이 기억나지 않으며 학습 과정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나는 내가 날 때부터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책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것이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쓰여졌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직업이며 어른이 되면 그것을 할 수 있고 그걸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것을 다섯 살 때 갑자기 깨달은 것이다. 그 후 나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한 적이 전혀 없었으며 그런 적도 없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기곰 인형 외에는 별로 남은 게 없다. 종이에 기록한 것은 전혀 없고 기억에 남는 것도 거의 없다. 나는 내가 수업 시간 중이나 그 외의 시간에 끊임없이 글을 썼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녹색인 외계인에 대해 시를 쓴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6세 혹은 7세였는데 그 당시에도 이미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 알 수 있다. 판타지와 동화 외에 나는 로마와 이집트에 대한 역사극도 쓴 기억이 나는데 아쉽게도 보존된 것이 없다.
12세까지는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나는 어떤 특별한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판타지를 썼다. 나는 범죄 소설 작가, 시인, 극작가 되었어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톨킨을 만났고 갑자기 나는 내가 내 삶과 글쓰는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판타지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용과 요정, 사악한 군주와 황량한 들판과 거대한 거미에 대한 쓰고 싶었다. 사실 나는 톨킨이 되고 싶었고 『반지의 제왕』을 쓰고 싶었다. 이미 그 자리를 누가 차지했으며 그 일을 누가 이미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다시 하면 안될 이유가 없었다. 2년 후 톨킨은 죽었고 그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10대의 대부분을 톨킨 판타지를 서툴게 모방하면서 그 자리를 채우며 보냈다.
17세가 되어서야 나는 내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고 모방에 가득 찼는지 알만큼 자기 비평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의 하나이다. 내가 그 장르를 너무 사랑했으므로 나는 내가 톨킨이나 어느 누구에도 전혀 빚을 지지 않는 완전히 독창적인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더 이상 판타지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던 기억이 난다. 그건 사람들이 17세 때 많이 하지만 18세가 되기 전에 잊어버리거나 21세가 되기 전에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종류의 거창한 맹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맹세를 나는 지켰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잠깐 다닌 후 나는 항상 의도했던 것처럼 작가가 되었다. 나는 시인, 극작가, 범죄 소설 작가도 되었다. 그리고 로맨스, 호러, 10대 소설, 아동용 만화, 그리고 그 외에 많은 것을 썼지만 판타지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 장르를 사랑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읽었지만 줄곧 내 머리 뒤에서 ‘아직은 아냐’라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왜 판타지를 안 쓰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제대로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항상 말했다.
나는 사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찾거나 의식적으로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뭔가가 내 머리 속에 숨어서 필요한 단서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작가가 되면 사람들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느냐고 항상 묻는다. 그건 농담 같지만 사실이며 사람들은 정말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대개 거기에 대해 답은 없다.
그러나 다른 걸 오랫동안 하다가 어떻게 판타지 작가가 되었는지, 대단한 독창적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번만큼은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내 아파트에 앉아 있었고 우체부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편지를 집으러 내가 내려갔을 때 친절한 우체부가 배달한 아이디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군이라고 부르는 중세 종교전쟁의 역사책을 소개하는 4페이지 짜리 작은 책자였다. 나는 그걸 실제로 읽지도 않으면서 손에 책자를 들고 앉아서 갑자기 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나는 역사와 상상력이 합쳐져서 친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내는 역사적 판타지를 언제나 좋아했었다. 거기는 요정도, 난쟁이도, 용도 없기 때문에 톨킨을 흉내내지 않으면서도 톨킨과 같은 창조적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역사의 많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를 많은 사람들이 써왔지만 내가 알기로 십자군 전쟁을 다룬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완벽했고 이상적인 판타지 환경이었다.
조사를 하지 않고 내가 가진 일반 지식만으로도 나는 그 자리에서 요점들을 나열할 수 있었다. 십자군 참전 군인들은 대부분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싸웠고 모든 경계선에서 항상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 뿐 아니라 땅을 위해서도 싸웠다. 어떤 이는 자신의 문화를 강요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적응하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인 것이었고 이미 소설의 좋은 소재였다. 하지만 역사를 판타지로 바꾸는 것은 너무 쉬웠다. 높은 기독교적 관습은 약간 과장만 하면 순수 마술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물리친 아랍 사람들도 십자군의 신앙과는 다른 천문학과 수점술(numerology)에 기초한 나름대로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정령(djinn), 악귀(ghoul), 이피릿(ifirit)에 대한 이슬람 이전 신화들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실제가 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기만 하면 그것이 존재하게 되었고,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왔던 아이디어가 하루 아침의 작업으로 구도가 잡히게 되었다.
책을 쓰는 데는 6년이 더 걸렸지만 그건 원래의 과정이 그런 것이다. 밝은 영감이 몇번 깜박거리고 나면 그것을 작은 단어 하나씩 세우고 부수고 다시 짓는 일은 느리고 지루하게 진행된다.
톨킨은 판타지는 신빙성이 있어야 하며, 등장인물들은 매일 매일 작동하는 세계,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판타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너무나 이상하고 초현실적이며 등장인물들은 꿈과 같은 풍경에서 돌아다니고 꿈에 나오는 인물처럼 행동한다. 또 그들이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살아서 꿈 밖의 세계에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루이스 캐롤이 규칙을 깨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마술로 가득 차 있다면, 특히 마술로 가득 차 있는 이야기일수록 마술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명확하고 분명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마술이 단순히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면 스토리에 아무런 긴장이 없어지게 된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소원을 빌어 문제를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고, 나름대로 문제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거짓을 만나면 그걸 단번에 알아 낸다.
다시 말하지만 판타지의 세계는 믿을 만 해야 한다. 우리는 이야기 밖에서,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삶은 진행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른을 위한 글쓰기는 자세한 세부까지 상상을 한 더 복잡한 세계를 필요로 한다. 나는 자기들이 안 볼 때 어른들이 뭘 하는지에 대해 아이들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더 자유롭고, 생생하고, 수용성이 있으며, 경험에 의해 위축되지 않는다. 그 속에 스토리를 담을 만큼 어떤 세상이 리얼하다는 것을 아이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해야 하는 일은 재빨리 스케치를 그리고 거기다 대충 색칠만 하면 된다. 우리는 독자가 각자 자기 머리 속에서 지어내는 도시에 모두 의존한다. 이것은 역사 소설가, 범죄 소설가, 현대를 배경으로 쓰는 작가들에게는 아마 더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자들이 알고 이해하는 진짜 도시, 진짜 제도, 위계 질서, 사회적 구조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판타지를 쓰는 우리들은 처음에는 창조하기 위해, 다음에는 납득시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그건 여전히 같은 일이다. 우리의 말이 독자의 눈 뒤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은 왜 판타지를 쓰지 않느냐고 내게 묻곤 했다. 요즘은 왜 판타지를 쓰냐고, 왜 진지한 문학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다. 대개는 모욕하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들은 서툰 방식으로 내게 찬사를 보내려고 한다. 물론 그 질문은 모욕이다. 왜냐하면 내 작품이 진지하지 못하거나, 문학적이 아니거나, 아니면 둘 다 아니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2백년 전이라면 나는 내 소설의 명예를 지키지 위해 바이런 경처럼 결투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은 그런 무식의 정도는 참고 살아야 하며 웃으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기를 배워야 한다. 이 사람들은 책이 사랑과 죽음과 정치, 전쟁과 파워와 자부심과 부패 등 문학의 거창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요정과 용과 마법을 다루고 있는 판타지를 무시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그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쓰고 있으며, 우리의 책이 다루고 있는 바도 바로 그것이며, 우리도 도서관의 문학 쪽 서고를 차지하고 있는 어느 누구만큼이나 그런 주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인간 세계의 모든 소재들을 다루고 있지만 요정과 용과 마법에 대해서도 쓸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들에게는 뭔가 빠져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없는 직접적인 유산, 연결 고리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질투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두뇌의 아스라이 먼 곳에서 그들은 몰래 동굴 입구 너머의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음침한 불길의 연기 냄새를 맡고, 언덕에서 천둥이 울릴 때 오래 오래 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늙은 목소리의 메아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호랑이의 포효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들은 어쩌면 약간 떨지도 모른다.
- 차즈 브렌츨리
- 글 / 차즈 브렌츨리(Chaz Brenchley)_소설가. 1959년생. 소설 『우트르메르』 『블러드 워터스』 『죽음의 불빛』 『은신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