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공연과 현대 공연 양식의 만남, 한국 연극과 서양 연극의 만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연극을 보러 다니면서, 그리고 탈춤과 마당극 같은 다른 공연 형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한국 연극 무대를 보면서 생겨난 관심은 한국 공연예술을 연구해 보고 싶은 욕구 쪽으로 점차 길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야는 내게 너무 넓어 보였고, 겨우 한국 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이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당시 박사 과정에서 서양연극을 연구하려던 나의 계획은 일단 접어두고, 매일 내가 여기서 접하고 있고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 쪽으로 뭔가 시작해 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최인훈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라는 작품을 공연으로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느낌이었던 서스펜스, 신비감, 느림이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알고 싶다는 욕구를 발동시켰다. 나를 결정적으로 이 작가의 세계로 빠지게 한 것은 두 번째로 본 「옛날 옛적 훠이 훠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그 당시 무대를 지배하고 있던 역사, 정치극과는 아주 달랐고,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주는 연극이었다. 나는 이 작품의 전설과 신화 사이에 있는 세계가 직감적으로 이해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무대의 미학적인 면을 느끼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경험 수준의 차원을 넘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이 연극에 더 깊게 다가가기 위해서 내게 가장 좋은 방법은 번역을 통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92년, 한국인 교수와 공역으로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첫 번역서인 최인훈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를 파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무대에서 본 작품을 그 이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번역 작업을 통해서였다. 한국 희곡에 대한 첫 관심은 최인훈의 희곡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장소를 탐색하듯 조금씩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희곡 작가들의 희곡 작품들을 찾아서 공역하고 출판하면서 확대되었다. 번역 외에도 연출 작업을 할 기회를 여러번 가지게 되면서 연극의 이론과 실제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 연극의 역사와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최인훈의 작품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작품처럼 내게 다시 요구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최인훈 연극은 나에겐 연극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졌고, 한국 연극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 속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자료집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1999년, 한국인 교수의 지도를 받아 파리7대학에서 최인훈 희곡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최인훈의 희곡 속에서의 비가시성 L'invisible dans le théâtre coréen de Ch´oe In-hun"인 나의 논문 주제는 최인훈의 희곡 작품에서 비가시적인 세계가 구체화되는 양상을 살피면서, 연희 예술과 설화의 세계에 연결된 희곡 텍스트의 구성 요소들을 분석하는 연구였다. 사실상, 이 작가의 희곡 속에는 비가시적인 세계 그 자체가 들어 있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천(과거 연희 예술과 설화 등)이 드러나 있는데, 이 원천에 붙어 있는 비가시성과 연결된 최인훈 극작술의 중요한 포인트를 찾아보려는 것이 연구의 핵심 목적이었다.
'비가시성'의 컨셉은 일반적으로 연극에서 기본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시성의 단순한 이면이 아니라, 그리고 가시적인 것을 붙들고 있는 비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나타나는 것이고 희곡 텍스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비가시적인 세계는 극적 행동 속에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 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나타난다. 마치 바다 속 미역의 흔들림을 보면 미역 자락만 보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가시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는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희곡 텍스트는 그래서 비가시성과 가시성 사이의 긴장의 공간으로 파악된다. 이 긴장은 최인훈의 시적인 지문 속에서 물질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확실하거나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 의해 발화되는 대화 속에서도 물질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박사논문의 연장선상에서, 최인훈 희곡 속의 비가시성의 여러가지 구체화에 대한 질문을 등장 인물, 특히 여성 인물에 중점을 두어 제기해 본 것이다. 등장 인물에 중점을 둔 것은 그 전에 논문을 쓰면서 최인훈 희곡의 인물들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특히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인물에 중점을 두고 접근한 것은, 이것이 나름의 질서와 원칙을 지닌 어떤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번 연구는 등장인물의 또 다른 위상을 보여주는 최인훈의 극작술을 탐구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최인훈의 작품은, 종이 속의 존재와 사회적인 존재 사이를 왕래하는 여성 인물들의 현존과 부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해골 뼈 위에 서 있는 우리 인간의 조건(죽음과 삶의 상존)과 연관시켜 연극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 다른 세계(비가시적인 세계와 가시적인 세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등)와 커뮤니게이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배우가 실현하게 되는 연극의 실제적인 면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최인훈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신체는 비가시적인 세계와 가시적인 세계가 서로 만나고 있는 지점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옛날 연희 문화의 원천, 즉 무당굿이라든가 탈춤 같은 쪽과 연결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인훈의 희곡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연구는, 최인훈 희곡 작품의 독창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일이며, 서양 연극에서 보이는 전형화된 '인물'이 아닌, 한국 연극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특이성을 부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카트린 라팽
글 / 카트린 라팽(Catherine Rapin)_번역가,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1957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