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한복은 5·16 당시 혁명재판소 재판관 제의를 거절했다 구속까지 당한 기개있는 법조인이었고 막내동생인 한말숙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에 의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될 만큼 언니 못지 않은 필력을 과시했다. 1941년, 훗날 한일·주택·신탁은행장과 한국종합금융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금융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김진흥과 부모님의 중매로 만나 결혼해 1993년 숨을 거둘 때까지 53년간을 해로했다. 시조모에 앓아누운 시어머니에 시숙모까지 모셔야 했던 대종가집 층층시하 시집살이 속에서도 문학 공부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영어와 일어를 독학해 훗날 이들 언어로 해외에 강연을 나갈 정도가 되었다(한무숙은 고등학교 때 앓은 폐결핵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슬하에 네 자녀를 모두 박사 학위 소지자로 키워냈으며 부군인 김진흥은 그녀의 사후 한무숙문학재단을 설립하고 한무숙문학상을 제정했으며 아흔을 바라보는 요즘에도 한무숙기념관을 홀로 지키며 먼저 간 아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삭이고 있다(그 연민의 정은 한무숙 사후 그가 지은 『여가(餘暇)』 『마음 가는 대로』 『못다 한 약속』 등의 에세이집에 담담하지만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그는 현재 간암으로 수년째 투병 중이다).
올해로 작고 10주기를 맞는 소설가 한무숙의 일대기는 한 뛰어난 여류작가로서의 그것보다는 남편과 시댁 식구 봉양 잘 하고, 자식 교육 잘 시키고, 거기에 자기 개발까지 게을리하지 않는 신사임당 류의 전통적·이상적인 여인상의 그것으로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실제 민족사의 수난을 다룬 역사소설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서의 한무숙이 남긴 문학적 업적들과 한국소설가협회장을 지낸 오지랖 넓은 문단 활동들, 그리고 한 사람의 아내이며 며느리이자 어머니로서의 한무숙이 남긴 헌신과 희생의 부피는 뭇 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집안일을 다 마친 새벽 한시가 돼서야 책상 앞에 앉곤 하던 아내는 평생 두세시간의 수면으로 버틴 완벽주의자"였다는 남편의 증언이고 보면 타의 표상이 되는 여자로 살기 위해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에게 요구됐던 그 재능과 열정의 크기에 일말의 씁쓸함이 깃드는 것도 사실이다.
성장기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무숙의 일생을 규정지었던 반가(班家)의 기품있는 아녀자로서의 생활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 못지 않게 작가 한무숙의 문학에도 짙은 흔적을 드리웠다. 그녀 소설의 두드러진 미덕인 작중 인물과 상황들의 현실성은 바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양반가문의 딸이자 며느리로서의 산체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었다. 한무숙은 그 유교적 덕성과 체험을 바탕으로 『역사는 흐른다』 『생인손』 『만남』 등의 대표작들에서 시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깊이있는 묘사력으로 특징지어지는 그녀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해 냈다. 특히 초기 천주교 신자로서의 다산 정약용의 고뇌와 갈등을 통해 구원의 문제를 천착한 1986년작 『만남』은 한무숙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데 UC버클리대 출판부에서 영역돼 호평을 받았고 리처드 워커 전 주한미국대사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한국 소설로 손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