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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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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미술의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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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기린
기린 한 마리 들고 나가 출근한다
기린 한 마리 늘 내 옆 자리 앉는 걸 좋아한다
기린 한 마리 들고 나가 밥 사 먹는다
기린 한 마리 들고 나가 술 한 잔 권해본다
미안하지만 나 혼자 갔다올게 하고는
기린 한 마리 술집에 앉혀놓고
화장실 갔다 온다
오늘 밤 기린 한 마리 잃어버리고
현관에 앉아 기린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잃어버린 기린은 목이 더 길다
내가 기린 한 마리 데리고 사는 건 비밀이기 때문에
실종 신고를 할 수도 없고
기린아! 기린아! 외쳐 부를 수도 없다
기린도 죽음이 가까워오면 저 혼자 숨을 곳을 찾을까
그러나 목이 길어 어디서나 다 보일 텐데
오늘밤 기린 기다리느라 내 목이 점점 길어진다
기린과 함께 걸으면 외롭지 않았다
기린과 함께 누우면 막막하지 않았다
관 뚜껑을 닫을 수도 없었다
목이 길어 관 밖으로 다 나오니까
이 늦은 밤에 기린은 어디에 있을까
혼자 초원에 갔을까
현관문을 열어젖힐 내 두 팔을 머리에 꽂고
어디 어디를 걸어가고 있을까
피가 피다
재봉틀 바늘처럼 따라오는 빗줄기를 피해 달아나다가
골목모퉁이 돌아 몸속에서 벽돌을 꺼내 붉은 담 쌓아가다가
가로등이 따끔 따끔 켜지며 쫓아오면 더 힘껏 달아나다가
마음 급한 매미들이 길을 썰어대는 소리 귀 기울여 들어보다가
발목에 쥐날 때처럼 저 멀리 빌딩의 창문들이 환하게 켜지면
빨간 콧구멍 흰 고양이가 담장 밑으로 코피를 떨어뜨리는 것 바라보다가
광목 한 필 펼친 것 같은 희디흰 담장에 맺혀 있다가
바늘이 몸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핏줄을 끌고 다시 나오면
혈관이 부풀어 솟구치고 한 송이 두 송이 참지 못하다가
땀구멍마다 아파라 아파라 가시가 따라나오다가
흰 고양이의 입속에 머리를 빼앗긴 어린 새 한 마리
내 손에 들린 작고 붉은 심장이 푸드덕거리다가
네 앞길이 구만리 장미꽃 밭이구나 하더니
피 맺힌 줄기를 떨치며 달아나다 그만 잡혀 버렸구나
몇 천 년 만에 몇 만 년 만에 겨우 한번 맺혔는데
흰 양말 신고 내디딘 붉은 주단이 피 웅덩이로구나
한 세월 수혈하다 세상 끝낸 것처럼 한없이 어지러워
골목 모퉁이를 돌아 그만 사라져 갔구나
매일 매일 붉고 붉게 솟구치더니 새파랗게 질려 갔구나
-- 장미꽃 피는 줄 알았더니
피가 피었구나
당신은 피가 핀 장미꽃 아래 거닐다 갔구나
흡혈귀처럼 병든 핏방울 빨아먹다 갔구나
높과 깊
6인실 가득 ‘깊’이 잠들어 있는 아줌마들의 ‘높’은 숨소리
‘높’에서 지금 막 도착한 신생아의 머리가 꿀떡 같이 질척하다
엄마의 천연색 얼굴을 첫 대면한 아기가 힘차게 울었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할머니가 ‘깊’으로 떠났다
누가 천연색 세상의 문을 쾅 쾅 쾅 박아 주었나 보다
곧 ‘높’의 나라 시민이 된 할머니에게서
갈래머리 여학생이 되었다는 편지와 함께 흑백사진이 왔다
나는 하루에 한번 ‘깊’으로 떠나고 싶어 침대에 엎드려 잠 잠 잠 애원했다
누가 파리채를 들고 겨우 내려앉으려는 내 ‘깊’을 팍팍 내리쳤다
하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파리떼처럼 나의 검은 잠이 곰실거렸다
‘높’에서 까마귀가 까마귀를 쳐다보면 분홍빛이 난다는데
내 몸속 ‘깊’의 것들은 서로 무슨 색깔로 인사할까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간질에 빠진 처녀의 뇌에 실려가는 사람처럼 탁탁
탁탁 복도에 울리는 옷걸이에 링거병을 걸고 가는 슬리퍼의 비명
누군가 현악기의 활을 높이 들어 밤새도록 불 켠 병원을 탄주했다
‘높’과 ‘깊’이 복도를 휘돌아 울며 돌아다니는 소리 들렸다
애원하며 ‘깊, 깊, 깊’ 내가 부르는 소리에 ‘깊’에서 깨어난
첫차가 한강철교를 건너가고 학생들이 교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밤새도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광대하고 거룩하신 ‘높’과 ‘깊’은 나를 삼켜주지 않았다
- 김혜순
- 시ㅣ김혜순_시인.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55년생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
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연인, 환
자, 시인, 그리고 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