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7월 19일 문화부장관(정한모)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그 동안 출판이 금지되었던 월북·재북 문인의 작품 출판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기영, 백인준, 홍명희 등 다섯명은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정부 차원에서의 조치는 몇 단계를 거쳐왔다.
1) 1976년 3·13 조치 : 문학사 연구용으로 학문적 논의를 허용하되 해방 전의, 순수문학으로, 생존하지 않은 월북·재북 문인에 한정한다.
2) 1987년 10·19 조치 : 월북·재북 문인에 대한 논의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그 결과물의 상업적 출판을 허용한다.
3) 1988년 3·31 조치 : 그 동안 납북이냐 자진 월북이냐의 논란 때문에 묶여 있었던 정지용·김기림의 문학작품 해금.
그리고 마침내 7·19 조치가 나온 것이다.
정부의 해금 조치는 레드 콤플렉스에 캄캄하게 갇혀 있었던 한국 사회가 그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상적 자기치유력을 어느정도 확보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북한과 맞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부면에서 북한을 감당할 수 있고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으며, 우리 사회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북한에 대한 적대의 벽에 균열을 냄으로써 남북한 사이 소통의 길을 여는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한국문학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온전한 현대문학사의 복원이 비로소 가능해졌음을 알리는 불꽃놀이의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국문학계의 연구는 해금된 월북·재북 문인들의 문학에 집중되었다. 은밀히 숨겨졌던 자료들이 공개되고, 옛 신문이나 잡지 속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발굴되었다. 권영민, 김재용 교수 등은 국내에 없는 자료들을 찾아 중국, 일본, 미국 등지를 다니며 그곳 도서관에 묻혀 있던 해외 자료들까지 찾아 공개하였다. 『해금문학전집』 『이용악전집』 『오장환전집』 『이기영전집』 등의 이름으로 작품들이 책으로 묶여나왔고, 『월북문인연구』 『한설야연구』 『정지용연구』 등 무수한 연구서가 쏟아져 나왔다.
생각해 보면 그 이전의 한국 현대문학사는 모두가 불구 상태를 벗어나 수 없었다. 전체를 이루는 중요 요소 일부를 배제한 문학사이기에 온전한 문학사일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로 인해 기술 대상이 된 나머지에 대한 이해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월북·재북 문인의 문학에 대한 연구 성과의 축적은 마침내 월북·재북 문인들의 문학까지 아우르는 문학사(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김재용 외 『한국근대민족문학사』)까지 낳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김윤식 선생의 『북한문학사론』 등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의 문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연구서까지 나오게 되었다.
정부의 공식 해금 발표가 있기 불과 5년 전에 나는 「1920∼30년대 한국 경향소설의 변모과정 연구」란 제목의 석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경향소설이란 곧 카프 조직원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이 중심 되어 일군,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한 톱니바퀴이고자 했던 혁명적 정치성의 소설이었다. 서슬 푸른 국가보안법이 핏줄 섬뜩한 허연 눈알을 번득이던 시절, 극소수 앞서 깨우친 민주 정신의 선각들 말고는 이 땅의 백성 모두가 레드 콤플렉스에 칭칭 동여매여 남뿐만 아니라 안으로 스스로의 생각 한올까지 철저히 감시하고 검열하던 때였다. 당연히 자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장처는 알지만 접근 자체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간신히 봉쇄망을 뚫고 들어서도 복사가 허용되지 않으니 난감할 뿐이었다. 읽고 검토해야 할 자료는 산더미처럼 많은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소장처 지하실 서고에 갇혀 있으니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도 연구하고자 하는 '경향소설의 변모과정'은 그 경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도 특별한 인연이 닿아 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소장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고, 엉성하나마 기한 안에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은 전광용 선생과 5년 뒤 문화부장관으로서 해금 조치를 발표하게 된 정한모 선생이셨다. 정한모 선생은 지도교수이시기도 했다. 엄청난 분량의 책이 더미더미 쌓여 있어 책더미 사이로 간신히 지나다녀야 했던 전광용 선생 연구실에서 늦가을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간에 심사가 있었다. 해방 직후의 극렬한 사상 대립의 시대, 6·25전쟁,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전쟁 이후 30년 사상적 부자유의 세월을 살아오신 두 분의 눈에 그 논문은 위험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세상 모르는 어린 제자가 다칠 지도 모르는 일, 공간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통과 판정을 내리셨다. 20여년 전 그 일을 떠올리니 새삼 그 어른들의 배려가 마음을 친다. 두 어른 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으니 은혜 갚을 기회도 사라졌다.
김기진 선생의 장손자 김호동 씨를 만난 일도 이 논문이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여름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분지라 본래 더운 지역인데 그 해 따라 유난히 더워 최고 기온 37도를 웃도는 날이 열흘 이상 계속되기도 하였다. 쉴새없이 흐르는 땀 때문에 몸 구석구석 곰팡이가 슬어 짓무르는 데다 하도 눈곱이 많이 생겨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이니 견디기 어려웠다. 체력이 달려 병든 수캐처럼 허덕이며 영천 일대 험한 산야를 죽을 힘으로 걷고 뛰었다. 일사병에 걸린 동료들이 속출했다. 한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견뎌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 여름날 저녁 휴식 시간에 키가 껑충하니 크고 얼굴이 검은 동료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김호동이라고, 김기진 선생의 장손자라고,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대학원을 나왔다고, 어디서 내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서 찾아왔노라고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문학운동에 관여한 업보 때문에 무수한 고초를 겪었고 마침내는 인민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죽었다 살아난 조부의 특별한 생애 때문에 자기 집안 사람들은 인문사회과학 분야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그랬다. 모두가 공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청년 혁명문인 김기진의 낭만적 열정이 비정한 역사 전개에 짓눌린 끝에 저처럼 선한 웃음으로 피어났구나, 그런 생각으로 감상에 젖던 그 여름날 저녁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이제 지난 시절 사회주의 문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풍토는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보이는 것일 터이다. 이따금 북한과 관련된 사상 문제가 터져나와 정치판 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이념 논쟁으로 들끓게 하고 편가르기와 악의에 찬 상호비방의 악다구니 속으로 끌어들이곤 하지만 일시적일 뿐 길게 지속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도 크게 변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완강하게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 어떤 체제라도 시간의 힘을 비켜갈 수는 없다. 듣건대, 북로당계 중심주의에 갇혀 그 동안 철저히 묵살했던 남로당계 문인들과 민족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문학사에 복원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 변화의 어느 단계에서 북한에 비해 훨씬 유연하고 폭 넓은 우리의 문학사 이해와 맞닿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남북한 문학을 아우르는 통일문학사를 엮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국가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면 그 통합을 재촉하는 것으로서, 국가 통합 이후라면 통합이 되었음에도 분단되어 있는 다른 영역들의 통합을 앞서 이끄는 것으로서, 역사 창조의 한 과업으로서의 통일문학사 기술을 멀리 예감해 본다.
정호웅
글 / 정호웅_평론가,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1958년생. 평론집 『우리 소설이 걸어온 길』 『한국현대문학사론』 『한국문학의 근본주의적 상상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