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창백한 이마라고 김현승은 그의 한 시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60년대의 11월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창백한 계절이었다. 신춘문예 응모작을 쓰려고 누구나 없이 밤을 지새고 원고지를 수십장 버렸다. 나도 밤마다 원고지를 수북히 버렸다. 어떤 친구는 필자가 아직도 시를 쓰고 있는지 탐색하려고 늦은 밤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올페의 신화를 내 식으로 해석하여 쓰고 있었다. 내 식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발레리의 나르시스 식으로 독백의 물음을 통하여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응시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발레리 식의 물음과 응시라면 새로운 시를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허나 그것은 나의 헛된 꿈일 뿐 원고지 한장도 써지지 않았다. 나는 물음과 응시를 포기하고 올페가 유리디체를 살리기 위하여 저승을 갔다 오는 길을 쓰디쓴 항해로 바꾸기로 했다. 나는 목포라는 항구에 살고 있었으며, 항해라는 일이 행복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는 나무들로부터 시를 출발시켰다. 올페가 죽은 유리디체를 찾아 저승으로 가고, 저승에서 노래(시)로서 저승신을 감동시켜 유리디체를 데리고 가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영(令)을 받았을 때, 나는 그 영을 시의(혹은 시인의) 계율과 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왜 그래야 했던지 생각나는 것이 없지만 그 부분을 써나갈 때의 기쁨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푸르디 푸른 絃을 율법의 칼날 위에 세우라
소리들이 떨어지면서 빠져나가며 매혹하는 음절로 칠지라도
너는 멀리 고향을 떠나서 긴 팔굽을 슬퍼하라
들어가 들어가라 계량하지 못하는 조직 속
밑푸른 심연 끝에 사건은 매달리고
붉은 황혼이 다가오면 우리들의 結句도 내려지리라
어쨌던 그 시를 끝내고 나는 그것을 조선일보 문화부로 보냈다. 나는 당선 통지를 별로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60년도에 한 번 입선되었을 뿐(그때는 입선이나 가작도 있었다) 내리 2년 낙방한 뒤였으므로 낙방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나는 시를 그만 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를 되물으며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거리를 술에 취해 걸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런 어떤 날, 목포문화협회 간사장으로 계신 차재석 선생으부터 사람이 왔는데, 혹시 훈이란 예명을 쓴 적이 있느냐? 그런 사람을 아느냐? 는 것이었다. 나는 薰이라는 이름과 목포라는 주소만을 적어 보냈었다. 나는 곧 문화협회로 찾아갔다. 차 선생은 "축하하네 축하하네" 하고 악수한 다음 "훈이라고 해서 정훈이라는 여자가 아닌가, 그 빈약한 올케의 회상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됐는데, 정훈이 그만한 시를 쓸 것 같지 않아. 자네에게 사람을 보냈네" 했다.
곧 오징어 발과 소주가 나왔다. 우리는 톱밥난로를 가운데 두고 술을 마셧다. 원로연극인 김길호 선생도 잔을 권했다. 그렇게 대여섯잔을 순식간에 받아 마시고 있는데, 조선일보 지국에서 당선 소감을 받아 보내라는 전갈이 왔다며 써 달라고 채근했다. 나는 술을 마시다 말고 옆자리로 가 '시는 말의 사원'이라고 시작되는 소감을 술김에 썼다.
신년호가 나오고 며칠 뒤, 서울의 김현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올페의 속도는 섹스의 속도라 했고 김승옥은 어려워 잘 모르겠는데 섹스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고 친구들의 편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즐거웠지만 당선이 그렇게 생각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60년도에 당선되었더라면 스타와 같이 찬란한 스포트를 받으며 서울행 태극호를 타고 올라가 광화문 거리를 걷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뜬금없이 들곤 했다. 기쁨과 즐거움은 적기가 있는 것인지 어리고 시건방져서 그런 생각을 했던지 알 수 없는 일이로되 아무튼 올페를 쓰던 밤들과 낮들이 나에게는 신성의 날들이었으며, 아직도 내가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것은, 그때의 신성이 얼마쯤 살아남아 가슴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 최하림
- 글 / 최하림_시인. 1939년생. 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 『겨울꽃』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