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작을 찾아
학교를 잃어버린 세대의 농밀한 서사

- 이제하의 「태평양」

  • 숨은 명작을 찾아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학교를 잃어버린 세대의 농밀한 서사

- 이제하의 「태평양」


  이제하의 「태평양」은 1964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것으로 첫 창작집 『초식』(민음사, 1973)에 수록되어 있다. 첫 창작집의 표제에서 기인한 바도 크겠지만, 흔히들 이제하의 초기 문학세계를 「초식」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얼음을 배달하는 평범한 인물이 4년을 주기로 선거병이 도져 결과가 뻔한 선거놀음에 지속적으로 휘둘리는 과정을 희화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70년대의 정치적 광기를 풍자함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권력의지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섬뜩하게 제시함으로써 이후의 이제하 문학을 예비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첫 창작집에는 이러한 「초식」의 세계가 어디에서 연원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는 소설이 숨어 있다. 「태평양」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이고, 소년 시절부터 『학원』의 단골 필자였으며 처음 써 본 시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이력을 가진 이제하의 소설을 우리 문학사의 주류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독특한 재능과 남다른 열정에도 불구하고 소위 당대의 시류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문학적 태도는 그를 그때그때의 문제적 작가로 거론하거나 어떤 일군의 흐름 한 가운데 끼워넣어서 이해할 여지를 별반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문학의 환경 속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온 셈인데, 이 점은 그간 그의 문학에 대한 접근을 상당 부분 용이하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을 읽다 보면 그의 이러한 개성이 동세대의 경험에 관한 농밀한 감수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삼 그의 문학의 세대적 전형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은 "그해(1953) 여름방학을 끝내고 얼마를 더 기다려서야 마침내 우리들은 본관학교건물을 다시 찾아 이사를 들 수가 있었다"로 시작된다. 거의 작가의 자전적 진술에 가까운 이 문장은 입학식을 치른 이래 근 3년 동안을 노천교실에서 이러저리 쫓겨다니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공부를 해오던 한국전쟁 직후의 고교생들의 경험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킨다. 즉, 청소년기에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의 성장에 관한 서사가 이 소설의 가장 중심적인 내러티브인 것이다.

  전쟁을 모티프로 한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윤흥길의 「장마」나 오정희의 「유년의 뜰」과도 비슷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학교'라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되기도 한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제도이자 공동체다. 이제하는 '학교'를 잃어버리고 여기저기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학교로의 귀환 과정을 통해 전쟁이 제도와 공동체에 가한 앙금과 분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소설사는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있어 '학교'란 무엇이며, 그 관습의 붕괴와 재건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아들을 잃은 교장, 부모를 잃고 고학을 하는 학생, 그 와중에도 여전히 별 것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사소한 일상이라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선생님들. 전쟁의 상흔이 아무리 치명적이라고 하더라도 소년들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다. 소년들은 하루아침에 군용병원으로 변해버리는 학교를 보며 기성의 제도와 규율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형편없는 것인가를 배운다. 그러나 이 배움은 기존 제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항과는 다르다. 이 세대의 성장은 전쟁이라는 참상에 맨몸으로 노출되었던 아버지 세대와의 공감과 화해가 함축되어 있다. 마치 동창생들끼리 자신들의 소년기를 회고하듯 구어의 활달한 문체를 구사하며 소년들의 일상을 서술하는 이제하의 문체는 과연 '태평양'을 바라보며 자란 세대의 자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럴 만하다. 세 가지 관점에서 그러하다. 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상처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 제도의 해체와 재건에 관련하는 남성공동체의 풍속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남성성이 공격적 마초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에 대한 공감과 포용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태평양」의 현재적 의의들이다.

신수정
글 / 신수정_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겸임교수. 1965년생.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