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에세이
爲想 둘

  • 대작 에세이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爲想 둘

▲  박상륭  
© 운영자
1. 有爲 / 無爲


  중원인(中原人)들이, 자기들 독자적으로 개발했거나(이런 경우에도 고증[考證] 대신 억측[臆測]이 가능하거나, 허용되는 것인지 그건 모르겠으나, 그들 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앞서 시작했던, 천축인[天竺人]들께 '아상스크리타[Asamskrita]'라는 것이 있어 말이지만, 그것이 통역을 거치는 도중 어디서) 전와(轉訛)한, 주된 사상 중에 '무위지도(無爲之道)'라는 것이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대로이다.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라는 것이, 중원식 '무위'에 대한 정의인 듯하다. 왜냐하면, '유(有)'의 개념이 먼저 정립되고서야 '무(無)'의 개념이 이뤄졌을 터이니, '무위'가 있으면, 왜 '유위(有爲)'가 없을 수 있겠는가. 본 패관(稗官)의 짧은 패견(稗見)에는, 헌데, '아상스크리타'를 한역(漢譯)한다면, 분명히 '무위'가 될 것으로 아는데, 이(아상스크리타)는, '조건을 구비해 있지 않은(Unconditioned)', 또는 '화현하지 않은(Unproduced)'의 뜻이라고 풀이 된다는 것. 앞서의 저 '조건'은, 위계(爲界, Pravritti. Skt.1))의 조건을 의미하는 것일 것으로, 유정들께 입혀진 사대(四大ㅡ地水火風)와 사고(四苦ㅡ生老病死), 그리고 운명 따위가 아니겠는가, 하고, '화현하지 않은'이란, 갈마와의 관계에서, 그것의 악력을 벗어난 상태(또는, 아직 그것, 즉 갈마[行爲]에 제휴하지 않은 상태도 포함되어야 할 듯함에도, 이것에 관해서 말하기는, 아직 너무 이를 테다)를 이름할 것이로되, 그것은 현재로서는, 형이상학이라는 자궁 속에만 피맺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있다. 까닭에 그것은 '화현을 입지 않은'이라고 일러진 것일 것이었다. 또 아니면, 그것의 자궁 속에, 위계가 피맺혀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지, 글쎄 그것은 우리가, 위계라는 이 태보(胎褓)를 찢고, 머리를 내밀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말이시.

  천축국의 방언(方言) 중에서, 아(阿)라는 접두어는, 그 뒤에 진 친 어휘의 뜻이 얼마나 크고 강하든, 그것을 송두리째 뒤엎어, 정반대말을 만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라는데, (예를 하나 들면, 불문[佛門]에서는 신[神]을 수라[修羅]라고 이르는 듯한데, 그 앞에다 '阿'자 하나를 턱 내세우자마자, 저것들이, 사나운, 못된 귀면[鬼面]을 들어내는 것을 보면, 언어가, 신들보다 막강할 때도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아상스크리타는 그러니, 상스크리타(Samskrita)의 반대말이 되는 것을 알게 되고, 동시에 인류의 사유는 유의 개념을 앞세웠던 것도 알게 된다. 상스크리타가 먼저 있었기에, 그것의 부정형으로써의 아상스크리타가 있게 된 것인 것. 이런 견해를 고수하기로 하면, 무에서 유가 발생했다는, 천지창조설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케 한다(가 자, 저기 저, 관운장 같은 웬 사내가, 눈을 부릅떠 꾸짖는 소리가 있다. 냅둬, 냅두라고 시방! ― 지푸라기 같은 팔뚝의 패관은 그러니, 움추린 자라 목이 되어, 냅두는 수 밖에 더 있겠는가이?). 상스크리타는 그러니, 조건을 구비한(Conditioned), 또는 형태를 입은(Formed)이라는 따위로 해석될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중원인들의 유위(有爲)도, 중매쟁이 색시 감정하기 식으로 요모조모 살펴 보면, 저것과 소이대동(小異大同)하지 않나, 다시 말하면, 언뜻, 하나는 체(體)를 말하고 있는 듯하며, 다른 하나는 용(用)을 말하고 있는 듯하게 여겨짐에도, 둘은 비슷하거나 같은 개념을 갖는 것들이 아닌가, 하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상스크리타/有爲)은 냅둬 놔 둘일이겠다.

  그런데, '아상스크리타/無爲'는, 언뜻 비슷한, 또는 같은 어의(語意)를 갖고 있어 보임에도, 그 어용(語用) 면에서는, 서로, 심지어는 대극적이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상스크리타는, 대단히 고차적 사유의 결과로 얻어진, 순수히 문화(文化)적인 것인 듯함에 반해, 무위도 또한 고압적 사고의 용광로를 통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음에도, 그 연금(鍊金)의 과정 중, 어느 일점에서 퇴조전이(退調轉移) 현상이 일어났던지, 거기서는 자연(自然)이 태어난 것(은 재도달했다고 해얄 것이지만, 수사학적[修辭學的] 질서를 지키다 보면, 저런 후레자식이 태어난다)을 보게 되어 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고 패관의 패관[稗觀]의 일단이므로 그 선에서 듣고, 웃어버리든, 한두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아야지, 그보다 덜도 더도 평가하려 할 일은 아닐 테다). 잇거니와, 한편(天竺)에서는, 자연(自然)을 문화(文化)화하고 있으며, 다른 편(中原)에선 문화를 자연화하려고 하고 있어, 어느 쪽에다 삼배주를 바치고, 어느 쪽의 수염을 잡아 채 뽑을지, 패관으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까닭에 이제껏 손님을 맞을 때마다 욹혀 대접한, 무슨 법(法)의 흰 뼈를 다시 또 끓이는 소리지만, 근래 패관은, 자이나교의 법설(특히 우타라디아야나)에 근거하여, 유정의 진화(進化)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뫎2)'론(論)의 확립을 서두르는 중이어서, 이는 지난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까닭에 패관은 우선적으로, 병아리의 발톱으로 코끼리의 가죽을 찢으려 덤비기나 같겠음에도, 중원인들의 도(道), 그것도 그들의 무위에 대해, 그 본의랄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이 도(道)는, 그 성격이나 형태상, 나중에 달마보디에 의해 설파된, (달마대사[達磨大師] 혈맥론[血맥論] 참조) 선(禪) (……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道, 道卽是禪,  禪之一字 ― 이는 도[道]와 불[佛]의 야합에서 생겨난 것이 선[禪]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해얄 테다)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는 것이며, 다름이 있다면, (예의 그 레비-스트로스 얘기의 천한번째 반복이지만) 하나는 '날것→썩기 = 자연(自然)의 축(軸)'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날것→익히기 = 문화(文化)의 축(軸)'에 올라 있다는 것인 듯하다(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자연/문화'의 축에도 그러나, 단견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은, 그는, 반숙[半熟]이라는 중축[中軸]을 상정하지 못했다는 그것인데, 그럼에도 고백해 둬야 할 것은, 수십년 전에, 그것도 짧은 독해력으로 한번 읽고 접어 둔 『The Raw and the Cooked』, 그 기억을 동원하고 있어, 패관이 그 일점을 놓쳤다면, 패관의 부지[不知]와 부주의의 탓으로 돌려 주기 바랄 뿐이겠다. 패관은 그래서 이 중축을 선문[禪門]에서 찾아 왔는데, 도통직전에는, 산이 산으로도 보이지 않고, 강도 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패관이 이르는 선척[禪尺]의 그 가운데 눈금이 그것으로 알고 있다).

  중원인들의 생각의 강 줄기는 모두 실용성(實用性)이라는 바다에로 모두어진다는 의견에, 패관도 동의하고 있는데, 그런즉 '도(道)/무위(無爲)' 등이, 아무리 초월적 형이상학적 주제라 한다 해도, 어만데, 예를 들면 비위계(非爲界, 니브리티) 같은 데로라도, 수로(水路)를 터 나갈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저들(특히 노[老]ㆍ장[莊]과 그들의 아손[兒孫]들을 가리켜 말이지만)은 그것을 백성의 생활 규범으로까지 삼으려 하기 뿐만 아니라, 치세도(治世道)로까지 확장하는데, 『老子』 제 삼장에는, 이런 도설(道說)이 있어, 접해 본 이를 감동케 하다가, 경악케 하고, 종내 절도케 한다. …… 고로 성인의 다스림은, (꺼꾸러질녀러! 치세[治世]에 성인[聖人]이 나서는 것 보았느냐? 권세라는 꽃 한송이를 꺾어 놓고, 야호[野狐]들 영산회[靈山會]한답시고, 노론[老論]/소론[少論], 남인[南人]/북인[北人] 패 나누어, 저 한송이 꽃을, 물고, 찢고, 밟아 묵사발을 만드는 짓이 위정[爲政]이라잖느냐? 성인[聖人]이라도 치정[治政]에 나서 콩콩 짖기 시작하면 불성[佛性]이 없는 것을! 새우들 등쌀에, 백성이라는 애먼 고래만 등 터진다)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是以聖人之治 虛其心) 배는 채워 주며(實其腹), 뜻은 약하게 해야 하지만(弱其志), 그 뼈대는 강하게(强其骨)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게 해야 하고, 욕망도 없이 해야 한다(常使民 無知無欲), 라고 하고 있다. 하기야, 백성을 저렇게 만들 수(使民)만 있다면, 성인들이 구현하려는 태평성세가, 어찌 저만쯤에 있다 하리요? 마는, 썩 재미 있다고 해얄 것은, 한다 하는 식자들이, 진시황의 갱유분서(坑儒焚書)를 두고는, 그 부당함을 들어 말하기는, 썩은 생선을 반찬해 먹은 입으로도 부족하여, 입술에 된장까지 바르고 침을 튀기되, 노자(老子)의 치세도(治世道)를 두고서는, 향긋한 차를 마신 입으로도 부족하여, 입술에 꿀까지 바르고, 분향한 뒤, 무릎 끓어, 받들어 설(說) 한다는 그것이다(패관[稗官]은 이를 들어, 패소[稗笑]를 금치 못하노라). 인용한 도설에 특히 문제가 되어 있어 보이는 부분은 분명히, 무지(無知)라는 것일 것으로 사료되는데, 그 자신들은 무지하지 안하여, 대단히 복합적 사고까지 행해낼 수 있는, 저들의 어떤 아손은, 무지의 지(知)라는 이상스러운 역설을 펴, 무지는 부지(不知 - 배운 것이 없어 알지 못함의 뜻이라고 하던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알고 난 뒤의 무지를 이른다, 고도 하는데, 부지의 패관께는, 이는, 두 고을에 좆단놈들을 싹쓸어 버리고 쫓겨 난 옹가년이, 마을(官衙)에 잡혀, 나으리님 듣기 좋으라고, 부덕(婦德)을 운위하기와, 별로 다름이 없어 보인다(이년아! 저 나으리는 달아야 될 좆을, 마을에 갈 때는, 떼어내 제놈의 마누라께 맡겨 두었다더냐?). 그런즉, 부덕이 높아 칭송받는 부인네란, 옹가년의 아랫입술을 빌려 말하면, 외간 남자들의 경험부터, 가랭이가 찢어지도록 한 뒤, 돌아와 영감을 받기 전에는, 오줌부터 누고 있기로써 덕스럽다 할 수 있다는 얘기겠냐, 무엇이냐? 그와 반대로, 춘향이의 윗입술을 빌려 말해 보려 애써 보기로 한다면, (안회든 도척이든) 우선 자연의 이치를 잘 살펴 안 뒤, 그 이치에 좇아 사는 것을 무지의 지(知)적 삶, 다시 말하면, 도(道)에 귀의하면, 무지의 지(知)를 체득한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해 낼 수 없는 것도, 아니기는 아니다. 아니로되, 저들(道門)의 말로는 성인(聖人)이라고 이르고, 근래 새로 이사 온, 선가(禪家)네서는 미친 늙은탕이(蕩兒), 또는 바보라고도 이르는, 저런 이들을, 무명중생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 없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있음인 것. 누구나 다 성인(聖人)이 될 소지는 갖고 있음에도,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우문은 그럴 때, 성인과 우중 어느쪽의 머릿수가 더 많은가(?)라는 데로도 쏠릴 수 있을 게다(여기서, 일러 말하는 엘리트주의가 나타날 듯하다). 모두가 성인이 되는 것은, 기대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론이며, 기대되어질 수도 있다면,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하는 치세도란, 들판 일 되어 가는 것을 보아람, 공중이나 물 속 일 되어 가는 것을 보아람, 설해질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문제는 그리고도, 이 무지가, 치자(治者) 쪽에서는, 무위의 무지가 못된다는 데 있을 게다. 상사민(常使民) 무지(無知)의 사(使)는, 대단히 정략적이며, 심지어는 연이나, (자신도 잘 모르는) 공산주의(에 대해, 뭘 말하려 든다면, 언어도단이 그것일 것이로되, 그 체제가 붕괴하고 난 뒤, 듣게 된, 중론[衆論]이랄 것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경제 문제는 이해했었던가는 몰라도, 인간 심리에 대해서는 잘 이해치 못했다고 이르는데, 마찬가지로 노(老)ㆍ장자(莊子)들은, 도(道)는 잘 이해했으나, 인간 심리에 관해서는 잘 이해했었다는 믿음이 들지 않는다. 물론, 상사민(常使民) 무욕(無欲)의 치도(治道)를 한번 뒤집어 본다면, 저들은, 인간 심리 중에서도, 욕망이 다스리기에 그중 어렵다고도 안 듯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랬기에 저 성인(聖人)들은, 백성의 마음은 비우고, 배는 불려 주어야 한다라고 설하기 뿐만 아니라, 얻기 어려운 재물이라고 귀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면(不貴難得之貨),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한다(使民不爲盜)라고도 이른다. 아마도 저들은, 그렇게 하기로써 백성의 욕망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지금부터 장황해질 수도 있는, 여러 말을 줄이기로 해서, 일문[一問]으로 만답[萬答]을 삼으면 어떻겠는가 라는 것은 이렇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혜능이, (스승이 입었던 헌옷가지며, 쓰던 턱 떨어진 밥그릇 따위) 형이하적 의발은 전수치 못했으나, 조(祖 - 六祖)라는, 형이상적 의발을 전수케 된 게송(偈頌)이, 신수의 것이 먼저 있었기에 의해서만 가능했으며,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 듯이, 도문(道門)의 무위자연 사상이나, 모순당착적 진리도, 이전의 다른 사상가들의 익힌(文化的) 사색의 결과 위에서만 가능하고, 또 가능적 의의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런 말은 그러니, 공자를 일예로 든다면, 저들이 어떻게 공자를 꼰아 내부딪치든, 공자는, 자연에 대한 문화를 중시했던 문화인이었다는 것, 그에 연유하여, 아낙네들 연애시 따위며, 낙[樂]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되, 흥만 아는 낙사[樂士]들 깽깽이 켜는 소리까지, 또 예[禮]는 어떤가, 극구찬양하기에 이르렀을 터이다. 그가, 돼지에게 예를 가르치고, 이리에게 인[仁]을 설했다는 소리 들어 보았는가? 그럼에도 노[老]ㆍ장[莊]들은, 사람에게 무위[無爲]를, 무지[無知] 무욕[無欲]을 설했더라 말이네) 패견(稗見)에는, 중원의 몇 늙은네들(노자)은, 인종(人種)이 어렵게 성취한 판켄드리야를, 시간을 되돌려, 카투린드리야, 그리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노력을 바쳐 왔던 듯한데, 자연의 법칙이 됐든, 또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되었든, 아무튼 도(道)라는 것이 있다는, 상정만으로,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우중을 깨우치려 했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신화(神話)가, 보다 더 하늘 일에 눈을 두고 있다면, 동화(童話)는 보다 더 땅의 일에 눈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본 패관은 알아 왔는데, 그래서 동화적 눈으로 저 늙은네들을 새로 건너다 보자면, 저들은, 모험 찾아 떠난 왕자들을 꾀어 들여, 소로 둔갑시켰다가, 힘줄이 약해지면 때려 잡아먹는 마녀로 보인다. 소야말로, 배 부르면(實其腹), 마음은 비어 있어(虛其心), 뭘 도모해 보겠다는 뜻이란 없는 데다(弱其心, 弱其志), 그 골격이 크고 강해(强其骨), 밭갈이는 물론, 모든 다른 힘들 일에 부려먹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다음 끼니를 위해, 뭘 쌓아 놓으려기는커녕, 한 끼니 배 부른 것을 되새김질 하기로, 귀한 젖까지 생산해 내는 데다(無欲), 주인의 뜻이 무엇이든, 심지어 도살장에로 끌려 가도 알려 하지도 알 바도 없으니(無知), 죽음까지도 표표히 초월해 있음인 것. 아으, 소여, 백성은 소여야 된다 말이지! 그렇걸랑 노공(老公)은, 목축이나 하실 일이지, 어쩐다고 인간세에 나서서, 사람들의 목에다, 도(道)라는 고삐를 매려 하는고? 우도(牛道)는 우생원(牛生員)들께! '천지는 인(仁)하지 아니하여,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기고, 성인도 인하지 아니하여, 백성을 풀강아지로 여긴다.'(제 5장)

  이래서 보면, 그것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 따위로 냅둬두지 않고, 치세도(治世道)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굴절(선[禪]이 그것일 테다)을 겪지 않는 한, 노장(老莊)및 그의 아손들의 주장은, 아무렇게나 찬양되어 져서는 안될 종류의, 좋지 않은 망우수 열매인 듯하다. 패관은 잡설이나 팔아 연명하는 자여서, 치도(治道) 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혀를 못가졌으되, 누가 저것을 날것인 채 응용하려 하면, 기대하는 태평성세보다는, 걸주 같은 성인들께 더 많이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그 최선의 형태는, 앞서 말한 바대로, 축생도(畜生道) 정도가 아닐 것인가.

  그러나 타유정에 대한 인간의 승리는, 그가 지(知)ㆍ욕(欲)을 함께 했다는 데 있었을 것이었다. (패관 투로 말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의 지혜는 문화에 기여하고, 욕망은 문명에 기여해 온 것인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 인류사의 흥망성쇠가 있었음인 것. 우리들의 세계는, (성경에) 애 밴 여자로 상징되어 있거니와, 인간의 욕망이 확대될 때, 거기 붉은 용이 나타나고, 지혜가 우세할 때, 거기 면류관 쓴 어린 양의 개가가 있다. 위대한 사회는 그런데, 붉은 용은 애 밴 여자가 분만하기를 기다려, 그 아이를 잡아 먹으려 벼르고 있고, 어느덧 태어난 어린 양이 저 붉은 용의 대갈통을 딛고 서 있어, 팽팽한 균형이 유지되어 있을 때 실현되는 것일 것이었다. 그것이 루베도(赤)일 것. 그러는 어느 순간, 저 붉은 용이 어린 양의 발목을 물어 빨아들이기 시작하면, 역사는 전환할 테다. 다시 니그레도(黑)에로 역조전이를 치웠음인 것. 현재로써 그 우주는 이원론의 기반 위에서 기복을 되풀이해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리고 집단의 삶(역사)은, 이 기복의 연속일 테다. 왜냐하면 집단은, 자아를, 갖지 못했으므로, 그 자아의 구원이나, 자아의 분쇄에서 성취되는 해탈에 대해, 고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자아를 갖는 모든 개인의 삶은, 집단 속에 포함되어 영위되고 있음에도, 집단의 삶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개인은, 어째도 악지(惡地)에로 떨어져서는 않되고, 낙지(樂地)에의 소망으로, 끊임없이 고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숙명인 것. 여기, 본 패관 식의 진화론, 즉 '뫎'론이 운위되는 자리가 있다. 중원인들의 그것과 달리, 같은 무위(無爲)라도, 천축인들의 아상스크리타는, 바로 저 진화의 정점, 그 궁극의 상태를 이름하는 것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행, 난행을 해서라도 달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도문(道門)의 무위(無爲)가 아니라, 범문(梵門)의 아상스크리타인 것은 분명하다. 하다면, 어떤 중년남자의 불(佛)의 상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설 자리가 있었던 것이었는가? 저 지혜의 바다를, 그는 과연, 알몸으로 헤엄쳐 건넜던 것이 분명한가? ― 이런 의문은, 논자(論者)로 하여금, 기독(基督)에게 바쳤던 것과 같은 경배를, (이 사람에게도) 바치게 한다. 라는 것은, 기독이 아버지에의 인식을 그렇게 했던 것과 꼭 같이, 이 사람은, 아상스크리타, 또는 니브리티나 니르바아나를, 그렇게 하여, 삼천대천세계를, 마음(心) 속에서 개벽해 버린 것이다, 과연 그렇다! 물론, 그 이전의 선현들도, 그것(心)을 노상 운위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도, 총체적으로, 또는 광의적으로 따진다면, 저들의 의견은, 다원론적(多元論的) 일원론(一元論)이라는 투의 역설로써 밖에, 달리 말할 수는 없는데, 말한 바의 이 사람에 의해서, 일원론적 다원론의 극복이 이뤄진 것을 보게 된다. 이 사람은 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것은 주지하는 바대로이되, 그래서 패관은, 그가 마음의 우주를 개벽했거나, 창시한 자로 믿어 의심치 않는 바였다. 이런즉 그렇다면 ― 앞서 자주 선(禪)을 언급해 왔으니 말이지만, ― 선(禪)은 그러면 무엇인가? 그건 개구리 대가리에 돋은 뿔 같은 것인가? 그것이 설 자리가 있는가, 라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패견에는, 변강쇠 달마보디(보디사트바들이란, 우주적 의미에서의 변강쇠들인 것들!)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뭐라구, 이눔 사미여? 패설[稗說]로 혀놀리기가 바쁜 패관 더불어, 선농선월[禪弄禪月]하시잤구?) 아마도, 중원에 도(道)라는 절세가인 옹가년(도[道]의 여성적 국면의 현빈[玄牝]은, 만웅[萬雄]을 다 싸아안는 자녀[姿女]거니! 그래야 두꺼비로부터 봉황까지도 까재낀다. 그런즉 튠향이는 이도령네 소실[小室]로, 옹가년은 우리네의 대실[大室]로!)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년 찾아 떠났던 듯하다. 이러자, 그의 면벽구년(面壁九年)의 비밀이 밝혀 진다. 그야 그년 더불어 살림하느라 그랬을 터인데, 그래서 얻은 자식이 선(禪)이란 것이었음은, 아는 이들은 안다. 앞서 어디서 인용한,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道, 道卽是禪'이 그것인데, 이(禪)는 그래서, 불(佛)과 도(道)의 야합의 자식이 분명하던 것이다. 조금 점잖은 음성을 꾸며 말하기로 하면, 그의 구년면벽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범법(梵法)과 불법(佛法)과, 중원인들의 삶의 근본처럼 되어 있던 도(道)를, 어떻게 혼합하여, 중원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중생들을, 그들에게 맞는 법으로 하여, 교화 제도할까를 두고, 고심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옘병에 용두질하겠다고, 하필 물도 설고 낯도 선 고장까지 굴러 들어, 무(無 - 무우) 따위나 깨우쳐 보겠다고, 슬관절이 어긋나고 어깨가 무너져 내려 앉도록, 굴 속에 처박혀 벽이나 꼰아 보았겠는가? (헴) 추측을 허락하건대, 그가 불(佛)을 품고 중원에로의 험로에 올랐을 때, 그는 과연 무슨 뜻을 품고 있었겠느냐?

  심(心)ㆍ불(佛)ㆍ도(道) 등은, 익히 잘 알려져 있었던 어휘였던 것, 그렇다고 성(性)도 반드시 낯선 것만은 아님에도, 선(禪)을 운위하면, 저것(性)이 새로, 심(心)ㆍ불(佛)ㆍ도(道)와 버금가는 품목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데, 그런즉 이 성(性)이란 무엇이기에 그러한가, ― 이 문제가 풀린다면, 선(禪)이 설 자리가 분명해 보일 듯하다.

  달마보디의 성(性)은, 패견에는, 프라크리티(Prakriti, Skt. 자연)에 대한 푸루샤(Purusha, 우주적 원인[原人], 아트만, 브라흐만, 우주혼[魂], 문화)의, 달마보디식 전와(轉訛)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의 대비어(對比語)인데, 그것이 중원의 방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성(性)으로 상정된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패견이다. 이 성(性)의 개발, 또는 눈뜨기에 의해 판켄드리야는, 다음 단계의 진화를 가능케 되는 것일 것이었다.

  (중어[中語]에도, 범어[梵語]에도 입문도 못해 본) 이런 부지(不知)의 패관의 패관(稗觀)에도, 뭔지 뜻의 곰팡이 같은 게 피어, 한 주발 막걸리라도 담글만 하다 싶으면 말인데, (달마보디의) 선(禪)은, 불(佛)과 도(道)를 한 솥에 넣어 끓여, 인간이라는 것들의 발목을 잡아 꺼꾸로, 그 솥에 처넣어, 공(空)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려는, 그 누른 물이나 아니었겠는가, 한다(해골 속에 담긴, 원효가 마신 물이 이것이었을 테다). 반복되지만, 선(禪)은 그래서, 만유(萬有) 중에서도, 특히 오관(五官)을 구비한 유정을 교화키 위한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막되게 말하면, 그것은 그러니, 불(佛)이나 도(道)와 달리, 야호(野狐)나 저씨(猪氏)들을 제도키 위한 법은 아니라는 것. 만유가 다 불성(佛性)을 가졌으며, 도(道)도 또한 그러하다 하되, 성(性)만은 판켄드리야만의 품성이라면 그렇다. 그것은 어미 프라크리티(自然)와 아비 푸루샤(文化)의 자식인 것. 아으 그렇다는 즉슨, 환 치는 여러 님들께선, 벽안호승(碧眼胡僧)의 화상을 칠 땐 모름직이, 눈썹이나 고부쟁이(거웃)는 성글게 할지라도, 턱수염만은 진하게 칠해야 할 테다. 서쪽에서 온 오랑캐는 어째 턱수염이 없느냐? (西天胡子 因甚無髮) 라고 흉보는 소리가 있잖더냐? 헤음 ― (패관이 턱수염 가다듬는 소리러람).

  2. 受爲 / 授爲

  야야, 저누무 개가 왜 저리 짖어쌌느냐, 아마도 사미놈의 먹은 손가락이, 뱃속에서 달을 가리키려 그러나 보다. 이래서 생각나는 것은, 문학이란, 저 어떤 사미의 손가락 하나를 잘못 먹은, 그 개 짖는 소리 같은 것은 아니겠는가, 글쎄 아니겠는가.

                    - 『대산문화』 2003년 가을호, 「漫想 둘」에서

   受爲

   經說 一.

  그 때에 부처님은,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그대가 유마힐거사께 가서 문병하라.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고 가서 문병하겠습니다.

  그래서 문수사리는, 모든 보살과 큰 제자 및 천인들에게 둘러싸여, 바이샬라성으로 들어갔다.

  ― 그런 뒤, 문수사리와 유마힐 간에 여차여차, 선문선답(禪問禪答)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간다. ―

  거사여, 문수사리가 묻는다. 이 병은 무엇으로 일어났으며, 오래 되었습니까? 언제나 낫겠습니까?

  치(癡)로 좇아 애(愛)가 있어서, 내 병이 났으니, 일체중생에게 병이 있으므로 나도 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 지면, 내 병도 없어 질 것입니다. (중략) 또 이 병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면, 보살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 여차 여차, 수염 단 두 노파 간에, 선문선답 비슷한, 수염 잡아 채기가 계속된다. ―

                  - 『우리말 八萬大藏經』 중 「유마힐」 참조

  經說 二.

  (사미여) 네가 숨을 드리 쉴 때에는, 중생의 모든 고통과 장애, 그리고 그들의 악업이, 찐득거리는 검은 타르(Tar) 같은 것이 되어, 너의 콧구멍을 통해 들어, 너의 염통으로 녹아 드는 것을, 생생하게 마음에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러며 중생의 불행, 악업 등이 (너의 속에서 녹았으므로 하여) 순화되어, 그들이 영원히 자유스러워졌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숨을 내쉴 때에는, 네가 쌓은 복과 덕이, 달빛과 같은 형태로, 너의 코끝을 빠져 나가, 중생께 흡수되어 지는 것을, 생생히 떠올려, 보아야 한다.

- 『The Great Path of Awakening』(Shambhala Pub.)에서

  授爲

  稗說, 혹은 吠說

  유마힐거사여, 당신은, 아프지 않을 수가 없겠나이다. 당연하게 병석을 지키고 계셔야, 중생이 덜 아플 듯하외다. 문수사리가 말한다. 그러나 나는, 거사의 병고(病苦)의 법은으로 건강하게 살려 하오니다.

  아으 문수사리보살이여, 그러하셔야 나도 건강을 회복하게 되지 않으리까? 유마힐이, 마음이 기꺼운 듯, 보탠다. 보살님의 건강함으로 인하여, 그 법은으로, 일체중생의 병고가 스러지기를!

  문수사리는, 합장 삼아, 한 무드라(손으로 하는 제스처)를 해 보이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무드라는 두 마리의 뱀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었다.

박상륭
글 / 박상륭_소설가. 1940년생.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열명길』 『아겔다마』 『평심』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