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 마음의 꽃물

  • 글밭단상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 마음의 꽃물

▲     © 운영자
의자와 식탁은 다른 가구에 비하여 목숨이 길다. 그만큼 사람의 체온을 오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집에 가서도 의자나 밥상의 생채기가 마른 풀처럼 수런대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파트란 곳에 처음 살다 보니 색다르게 보이는 것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외출 나오는 가구들이다. 가구란 것이 식구의 또 다른 이름인데 말이다.

  아파트에 사시는 노인들은 그 버려진 식탁이나 소파로 휴게실을 차려놓고 여름 한철을 나시곤 한다. 보기에 따라선 궁상을 떤다 할지 모르나 주름진 세월이 갖다준 저 평화가 나는 좋다. 노인들이 약장수나 무슨 재미있는 일로 아파트 밖으로 놀러 갈 때도 있는데,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비아냥거리던 젊은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그곳을 차지해버린다. 냉장고에 깊이 감춰두었던 각종 시원한 것들을 끌어다 놓고 오래오래 수다떨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풍경도 사람 사는 아름다움이려니, 누나 같고 아내 같고 처제 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오늘 나는 오랫동안 미뤄놓은 아파트 잔디밭의 잡초를 뽑기로 한다. 잡초는 없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아파트 화단에는 분명 잡초가 많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라서 그런지 풀이 산더미다. 뽑아내는 게 아니라, 경비실 아저씨가 일년에 두어 차례 예초기로 베어버린단다. 땀을 뻘뻘 흘리며 풀을 뽑다보니 부아가 치민다. 저 젊은 아줌마들이 평상에 앉아 깔깔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진다. 좀전까지만 해도 신선한 풍광으로 비쳤는데 땀과 흙이 범벅되면서 마음이 엉망이 된다.

  풀을 뽑아내고 흩어져 있던 봉숭아와 맨드라미와 분꽃을 옮겨 심으니 좋은 화단이 하나 꾸며졌다. 다시 마음이 좋아진다. 젊은 아줌마들의 수다떠는 소리가 다시금 즐겁게 들려온다. 낡고 게으른 아파트가 갑자기 덩치 큰 기쁨으로 덮친다.

    아파트 1층으로 이사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여자다

    못생긴 노처녀가 욕심을 부린 것이다

    부러진 우산대를 치켜들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양손을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있다

               - 졸시 「꽃물고치」 전문

  보잘 것 없는 화단 하나 만들고 시 한 편 걸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횡재인가. 나에게 시는 번번이 이렇게 보너스다. 출렁거리는 작은 감정들이 시의 씨가 되었다가 삶의 변죽도 툭 건드려 보는 것이다.

  잡초 무성한 아파트가 아니라면 어찌 이 시가 세상에 나왔을 것인가. 어찌 막 부화한 팔순의 처녀성을 만날 것이며, 탄생과 한 끈으로 이어진 수의의 솔기를 건드려 볼 수 있겠는가. 온 세상이 저 수의를 묶은 광목실의 실마리에서 시작됨을.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설렘의 크기가 바로 우주의 크기이며, 신의 숨소리가 미치는 넓이라는 것을.

  뙤약볕에 나온 풀뿌리가 시 한 구절을 주고 갔다. 세상 모든 것들의 덕분으로 내가 꽃물 드는 삶의 이치를 베껴 쓰라고 한다.

  내 시가, 내 마음의 집에서 나온 생채기 많은 평상이나 의자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매번 10점에도 못 미치는 나의 받아쓰기여.

이정록
글 / 이정록_시인. 1964년생.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