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 그림자의 목소리

  • 문학칼럼
  • 2003년 겨울호 (통권 10호)
* 그림자의 목소리

나보다 더 나같은 나는 내 그림자이고, 나보다 더 나다운 진짜 나도 내 그림자이다. 나는 다만 진짜인 내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인, 가짜일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행위가 문학하는 것이리니, 어찌 문학만이랴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리니―.
  그래서 한 시인이 쓰는 그의 모든 시는 결국 그의 자화상일 뿐. 그러나 자기를 찾아가는 찾아내는 행위야말로, 인간탐구이며 모든 존재의 탐구일 게다. 흔히 불교에서 말한다는 참나인 진아(眞我)와 나의 확대개념인 큰 나 즉 대아(大我)에 이르러, 세상만물이 죄다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니, 승려나 사제와 시인의 차이란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면, 잘못된 생각일까?  

  프랑스의 시인, 작가이자 여행가인 블레즈 상드라르 원작에, 미국의 마샤 브라운이 그림을 그린 아동을 위한 책 『그림자』를 만났다. 제목에 끌려서 골라든 이 책을 집어든 순간, 손끝이 쩌릿쩌릿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림자에 대하여 생각해 온 때문이었을까? 마치 내 안에 숨어 기다리던 불씨가 바람을 만나 불붙으며 피어오르는 듯 했다면 과장일까?

  젊음이 지겨워 미칠 것 같았던 한때는 그림자를 고독으로 보았다. 나를 미행하며 내 모든 약점을 샅샅이 엿보는 정직한 나 자신이라고. 나의 위장과 허세를 고발하기 위해 증거자료를 수집하느라고 나를 미행한다고. 그래서 그림자를 따돌릴 수도 없고, 그림자의 미행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는 나는, 그림자의 마술과 주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탄식도 했다.

  그림자에 대한 이런 생각은 세월과 함께 다소 변하기도 했고, 잠재되고 나타남을 반복하면서, 그림자야말로 진짜 나 자신이고, 나야말로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라고―, 가장 나같은 나, 가장 나다운 나는 내 그림자밖에 없다고, 따라서 나야말로 가짜이고, 진짜 나인 그림자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블레즈 상드라르의 『그림자』는, 내 실체가, 내 그림자라고 일러주었다. 어쩌면 내 그림자는 전생의 나일지도, 아니 미래의 나, 차생(次生)의 나인지도 모를 일, 그림자는 표정도 목소리도 없으니, 전생의 내 모습이나, 차생의 내 모습을 내가 모를 수밖에, 그림자의 표정을 살피려고 불빛에서 햇볕에서 온갖 유치한 짓을 시도해 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 적도 몇번 있었지. 또한 그림자가 내게 들려줄 이야기야말로, 내게 다시 없이 유익할 것이라고 여긴 나머지, 몇 시간씩 내 그림자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고, 그림자의 이야기를 들어내려고 마음 비우고 귀 기울이는 집중도 시도해 보았다. 전생의 나와 차생의 내가 현생의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물론 결국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표정도 목소리도 없는 그림자에게서 내가 읽어 낸 것, 들어낸 것이란

  나말고 날 괴롭힌 다른 누가 있었던가

  나말고 나를 더 증오한 다른 누가 있었던가

  나말고 나를 더 사랑한 다른 누가 있었던가

  나말고 누가 내 세상을 괴롭혔던가

  세상이 나를 괴롭힌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괴롭힌 것을

  거리만한 학교가 어디 있으며 / 세상만한 대학이 어디 있느냐고,

  그림자가 내 전생의 나이든지, 차생의 나이든지간에 그가 바로 진짜 나이며, 나야말로 그림자의 그림자인 가짜일 뿐이라는 오래 생각해 온 것만 거듭 확인했을 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진짜 음성이라고, 진짜 나인 내 그림자가 일러준 것이라고.

  그림자! 저마다의 존재는 전생의 그와 내세의 그와 함께 현재를 살고 있다고, 그림자는 알고 안타까워해도 정작 그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시를 쓰는 일이야말로 한평생 저 자신의 발견 과정이며, 과거와 미래의 제 모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전생과 차생의 나인 내 그림자의 없는 표정을 읽어내고 없는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들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다시 보니, 떨어져 나뒹구는 플라타나스잎도, 서리맞아 주저앉은 달개비풀도 누구 아닌 나 자신이란다. 돌아보니 안보이던 그림자가 등뒤에 바짝 따라붙어 있었다.  

유안진
글 / 유안진_시인, 서울대 교수. 1941년생. 시집 『달하』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봄비 한주머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