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은 중국 육조(六朝) 시기 동진(東晉, 317∼420년) 말에서 송(宋, 420∼479년) 초에 걸쳐 살았다. 이 때는 내우외환이 계속되고 결국 왕조까지 교체되는 혼란기였다. 도연명은 젊었을 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는 뜻을 가졌으나 문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쇠락한 가문 출신의 시인이 벼슬길에서 이를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도연명은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부귀영달을 추구하는 세속 사람들을 쫓아 벼슬길에 연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도연명은 "세상과 내가 서로 어긋남"(「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을 뼈저리게 깨닫고, "마침내 곧은 본성을 지키고자 옷을 털고 전원으로 돌아와"(「음주(飮酒)」 19), 6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고향에서 지냈다. 도연명에 있어서 전원으로의 회귀는 소극적 도피라기보다는 차라리 적극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고금(古今)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주(宗主)」라고 일컬어지는 도연명의 문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도연명의 작품은 현재 125수의 시와 3편의 사부(辭賦), 그리고 10편의 산문(散文)이 전해진다. 도연명의 문학 세계를 가장 잘 대표하는 장르는 시이다. 도연명이 일생토록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홀로 고고한 인격을 유지하였듯이, 그의 시 또한 시단의 일반적인 풍조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귀족 중심의 중앙(中央)의 시단(詩壇)에서 사교성이 짙은 시를 짓기보다는 평민으로 시골에서 살며 자신의 생활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시대의 조류와는 다른 개성적인 시를 지었다. 도연명이 살았던 시단에는 신선 세계를 추구하는 유선시(遊仙詩)와 노장(老莊)의 말로 이치를 나타내는 현언시(玄言詩), 그리고 산수시(山水詩)가 성행하였는데, 도연명은 전원시(田園詩)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의 시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초연히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고결한 인격과 진솔한 감정이 나타나 있다. 영회시(詠懷詩)에서는 난세를 살면서 느끼는 감회를 노래하였고, 또 삶과 죽음을 비롯한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철리시(哲理詩)를 통해 나타내었다. 표현에 있어서 도연명의 시는 수사(修辭)와 기교에 힘을 기울인 당시의 시단과는 창작 경향을 달리하여, 질박하고 간결한 언어로 심후한 뜻을 나타내는 평담(平淡)한 풍격을 형성하였다. 도연명의 사부와 산문 또한 시와 마찬가지로 질박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진실된 감정을 표현한 데에 특색이 있다.
도연명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4백년을 통해 가장 탁월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문학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때에도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의 한 사람으로 그 이후 당(唐)·송(宋)·금(金)·원(元)·명(明)·청(淸)에 이르는 모든 시기에 걸쳐 많은 문인들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도연명은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한문학(漢文學)에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일본을 비롯하여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에도 현재 도연명의 명시(名詩)들이 널리 소개되고 있어, 도연명의 시문은 세계 문학의 하나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도연명의 작품은 현대에도 고전 명저로서 계속 읽히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도연명의 문학 세계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도 효과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시나 문장 몇 편만을 뽑아서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작품 전체를 완역(完譯)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난해한 자구(字句) 등에 대해 상세하게 해설하고 평이한 말로 옮기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 제목·시구(詩句)·문구(文句)의 색인을 덧붙이면 도연명 시와 문장을 쉽게 검색하는 데에 도움이 클 것이다. 물질 추구에 빠져 나날이 정신 세계가 황폐해져 가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 있어서 도연명의 시와 문장은 시원한 청량제(淸凉劑)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