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희 불역 시선집 『찬밥을 먹던 사람』 다른 번역물의 경우에도 흔히 그렇겠지만 문정희 시선집이 브뤼노 두세 출판사에서 나오기까지 나는 번역자로서 기쁨과 실망, 근심과 인내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판사 교섭에서부터 시집 출간의 결실을 맺게 될 때까지 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그 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유럽 최초의 여성 작가 전문 출판사인 <에디시옹 데 팜므>를 1968년에 설립한 프랑스 여성 해방 운동 창시자 앙투와네트 푸크는 이 시집의 공역자인 소르본 누벨 제3대학의 미셀 콜로 교수에게 한국 페미니즘의 시 출판 의향을 전화로 호기롭게 약속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출판사에서의 출판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다.
시 선정에서도 <에디시옹 데 팜므> 독자층의 성향을 고려해 문정희 시인이 40년에 걸쳐 출간한 10권의 시집들 중에서 80편을 골랐다. 한국 가부장제의 사회 모순과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며 강한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즘이 반영된 시가 더 큰 반향을 얻을 것으로 판단하여 다소 감상적인 전통적 의미의 여성시는 가급적 배제하였다. 그리하여 통상적인 ‘시적’ 수식과 장식음을 떨쳐낸, 한국 여성의 남루한 실존과 지극히 산문적인 일상을 바탕으로 하는 시들을 다수 번역하였다. 「파를 다듬으며」, 「식기를 닦으며」, 「작은 부엌 노래」, 「제목없는 하루」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상식적 모성이나 고상한 상념에서 벗어나 여성의 육체적 조건과 그 정체성을 사유하는 「알몸 노래」, 「유방」, 「거웃」, 「혹」, 「탯줄」 등도 우선적으로 골랐다. 시선집 번역을 마친 뒤 ‘문정희, 한국 여성시의 강한 목소리’라는 제목의 발문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서구에서의 여성 운동의 변천과 한국 여성시에 나타난 다양한 의식의 흐름을 비교하고 문정희 시에 반영된 한국 페미니즘과 ‘현실의 서정’을 주조로 하는 그녀 특유의 시 세계를 부각시키려 했다.
프랑스에서 외국 번역시를 다루며 인지도를 갖고 있는 출판사라고 해도 그 독자는 무척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 처음으로 소개되는 한국 시인에 대한 관심은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미셀 콜로 교수와 나는 <에디시옹 데 팜므>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막강한 여성 독자층에 기대어 시집을 출간할 필요를 느꼈다. 그 출판사는 본래 시를 취급하지 않아서 시집의 출판을 주저했다. 출판 설득을 위해 나와 콜로 교수가 출판사로 보낸 전화와 메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결국 출판사 내부의 복잡한 상황과 세계 여성 작가 사전 출판 이라는 방대한 기획을 이유로 출간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책이 나오면 진열장에 멋지게 전시해 주겠다는 사과 겸 위로의 말을 전해 들었다.
십여 년 째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는 <시인들의 봄> 행사 위원장 장 피에르 시메옹에게 문정희의 시를 보여 주었을 때 그는 그녀의 시가 강하고 짜임이 견고하다고 흡족해했다. 그리고는 《유럽》지의 장 밥티스트 파라에게 원고 심의를 의뢰하였고 이에 문정희의 시가 그 전통 있는 문예지 964-965호에 소개된 바 있다. 콜로 교수의 주관으로 열린 현대시 세미나에 초청된 시메옹씨는 우리 두 번역자의 실망을 전해 듣고 선뜻 브뤼노 두세 출판사를 교섭해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2011년 프랑스 해외 영토의 해를 맞아 『세 대양의 시』 특집 시선을 출간한 두세씨는 파리 도서전시회에서 동 시선집을 중심으로 토론회를 주관하였다. 그때 한국 번역시 출판 의향을 문의하자 그는 호감과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번역 원고를 편집위원회를 위시한 여섯 사람 이상이 석 달에 걸쳐 읽고서 출판 결정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독서평에서 문정희가 동양 여성 시인이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파토스를 견제한 유머, 진솔하고 거침없는 어조가 현대적 감각의 번역과 더불어 신선하고 낯 설은 모더니티로 큰 감동을 준다고 하였다. 이 출판사의 노선은 ‘생동하며 관대하고 열려있으며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시,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를 더불어 강해지게 하는 시’를 발굴하고 출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문정희 시인의 시가 그들의 출판 이념에 부합하므로 기꺼이 출판 계약을 맺겠다고 하였다.
그의 출판 동의서에서 밝혔듯이 문정희 시의 시적 가치와 유려한 번역을 충분히 인정하고 출판 지원금을 받는 혜택에도 불구하고 두세 씨가 염려하는 것은 한 번도 프랑스에서 시집이 출간되지 않은 외국 시인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시집 편집과 교정 작업을 수차례 직접 같이 하며 보여준 두세 씨의 열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는 지난 날 <에디시옹 데 팜므>의 눈치를 보며 시가 개밥의 도토리 격으로 취급되는 서글픔을 잊게 해주었다. 시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정하는 시 전문 출판사에서 한국 여성 시인의 시는 그 긍지를 되찾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이번 번역 시집 출간 작업을 하면서 한국시를 쉽게 출판해주지만 별다른 홍보 노력도 없이 그냥 시집을 찍어 내는 걸로 만족하는 안일한 태도의 출판인보다는 다소 오랜 시일과 많은 노력이 들지라도 책이 나온 이후에도 성의를 다하는 출판인을 찾기로 다짐했다.
시집 출간 한 달 후인 11월에 열리는 <독립 출판인> 도서 전시회에서 문정희 시인을 대신해 시집 사인을 맡아달라고 출판사로부터 제안이 왔다. 내년 삼월 <여성의 날>과 <시인들의 봄> 행사에 맞춰서 문정희 시인의 낭독회와 강연회 등을 기획하고 있는 두세 출판사와 이 모든 것의 실현을 위해 후원하는 대산문화재단에 감사드린다.
※ 불역 『찬밥을 먹던 사람』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에디시옹 브뤼노 두세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