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던 아버지께서는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 노량진의 황토배기에 집을 한 채 사셨다. 논 한 섬지기를 팔아야 하는 큰 결단이었다. 훗날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이런 질문을 드렸다. 저희들이 꽤 어렸는데, 어떻게 객지에 보낼 수 있으셨어요? 저라면 못하겠는데요. 아버지의 대답은 무참하도록 간단했다. 너하고 나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3월에 전학을 하여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콩나물 교실’이니 ‘콩나물 버스’니 하는 말이 쓰이던 1960년대 중반인지라, 배정받은 6학년 1반의 내 번호는 놀랍게도 92번이었다. 내 뒤로도 두 명이 더 전학을 왔으니, 쉬는 시간에 복도라도 나가려면 책상을 여러 개 타고 넘어야 했다.
나보다 먼저 올라온 형도 자취를 하기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우리를 돌봐줄 친척을 찾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통에 서울에서 거처 구하기가 정말 어렵던 시절이라서, 우리 집 방 한 칸을 거저 쓰는 대신 우리 형제를 돌보아 줄 사람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우리한테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나는 무엇보다 적적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겨주는 이 없는 방에서 뒹굴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곤 했는데,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시작된 독서였다. 나는 점점 책과 가까워졌다. 특히 시와 소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독서신문》이라는 주간지가 있었는데, 밑줄을 쳐가며 그 신문을 읽고, 거기서 알게 된 책을 구하러 청계천 헌 책방을 기웃거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사주지 않으셨다. 공부에 방해된다기보다 라디오가 우리한테 필요 없다고 여겨서 그러셨을 것이다. 1950년대 말에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맨 처음 라디오(물론 진공관 라디오)를 구입했지만 오후 네 시에 나오는 전국 물가 방송을 듣는 데만 쓰셨다. <장희빈>이라는 라디오 연속극이 온 국민을 사로잡은 적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그걸 같이 들을 때에도 아버지는 헛간에서 여물을 썰곤 했다.
어머니가 나서서 애를 쓴 끝에 드디어 우리한테 라디오가 생겼을 때, 그 기쁨은 정말 컸다. <세시의 다이알>,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는데, 전화기가 없어서 ‘다이알’을 돌려 팝송은 신청하지 못하고, ‘밤을 잊은’ 채 몽롱한 내용의 글과 신청곡을 엽서에 적어 보내곤 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라디오는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준 매체였다. 교향악의 어느 마디에서 문득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나는 한밤중의 고전음악 프로그램에서 처음 체험했다.
그런데 사춘기 청소년이 라디오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 세상은 이미 라디오가 아니라 텔레비전 천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로 세든 신혼부부 방에서는 혼수로 가져온 흑백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쇼와 연속극 소리가, 얇은 불록으로 된 벽을 뚫고 들려왔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영화 이야기를 해댔다. 라디오에서 ‘듣는’ 것보다 거기서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고향 집은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부모님도 텔레비전을 못 보는 판에 우리가 그걸 놓아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홍수환의 권투 시합이나 김일의 레슬링 경기 같은 게 중계될 때면 형과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따지자면 집주인에 해당하는 우리는 옆방 새댁한테 압력성 부탁을 하여 겨우 텔레비전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대한 남아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일본 선수를 끝장내는 장면을 숨죽이고 기다리는 동안 어디선가 솔솔 풍기던 화장품 냄새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텔레비전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나는 오랫 동안 라디오로 음악을 듣고 소설책으로 세상을 읽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텔레비전처럼 ‘보면서 듣는’ 자극적인 매체에 늦게 노출된 게 오히려 생각하고 상상하는 힘을 키워준 듯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 문화적 지체 상태가 참기 어려웠다. 영화를 좋아하여 영화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월요일만 되면 텔레비전에서 본 ‘주말의 명화’ 이야기를 해댔다. 영화는 분명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세상을 보여주는 ‘새로운 책’이었지만, 극장에 갈 돈도 없고, 가더라도 웬만한 영화면 붙어 있는 ‘청소년 입장 불가’ 딱지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갈 배짱도 없었다.
드디어 시골집에 전기가 들어와서, 서울의 우리 방 책상 위에도 빨간 플라스틱 케이스의 텔레비전이 놓였다. 나는 시간만 나면 그 ‘바보 상자’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성적이 마구 떨어지자 겨우 정신이 돌아와서 시청 시간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 남은 게 영화 프로그램, 그중에서도 <형사 콜롬보>였다.
| ▲1968년부터 미국 NBC TV가 제작하여 방영한 시리즈물 <형사 콜롬보> | |
<형사 콜롬보>는 텔레비전용 시리즈 영화였다. 그게 방영되는 날이면 나는 아무한테나 그걸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내 친구 영화박사는 의외로 시큰둥했다. 무슨 추리영화가 범인을 먼저 보여주느냐, 범인을 알고 보는데 무슨 재미가 있느냐고 그가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재미가 있었으므로, 그 이유를 찾아내어 ‘박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래 끙끙대어 내가 알아낸 사실은, 보통 추리영화에서는 형사와 관객이 시합을 벌인다면 이 영화에서는 형사와 범인이 시합을 벌인다는 점, 그러니까 영화 자체가 일종의 게임이라서 사건도 여러 가닥이고 더 재미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설명을 듣고 친구의 코가 납작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걸 알아내겠다는 목적 아래 시리즈 몇 편을 골똘히 보다가, 내가 어느새 이야기를 즐기는 재미와 함께 분석하는 재미에 맛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여 이젠 텔레비전이 컴퓨터에 먹혀버렸고 나도 더 이상 시골 출신 운운할 나이가 지났다. 어느 날 플롯을 가르치기 위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다가, 그게 <형사 콜롬보>처럼 범인이 미리 밝혀진 이야기의 원조 같은 작품임을 발견하였다. 텔레비전도 어떤 면에서 부모님 같은 역할을 했음이 놀라웠고, 재미로 시작한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어 다행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