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데뷔작
두 번의 등단, 두 번의 절망

  • 나의데뷔작
  • 2012년 겨울호 (통권 46호)
두 번의 등단, 두 번의 절망

 
 
1.


1976년 대학 예과 2학년 학기 초에 어렵게 구한 등록금을 나는 난처하게 지켜보았다. 이미 나는 출분이라는 말에 휩싸여 있었다. 출분(出奔)은 말 그대로 도망하여 달아남이지만 70년대 문학청년에게 그 말은 문학수업을 위해 어디로 칩거하는 편애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출분 전에 벌써 고향 영천의 친척집을 떠올리며 고독한 행복을 즐기는 이 문청의 나이는 막 스물을 넘겼다. 결국 그 다음 날 청년은 친구들과 출분식을 거행했다. 사전과 시집 열 몇 권과 빈 공책 등이 짐의 전부였다. 등록금이 한 학기를 겨우 버틸 만큼의 최저 생계비가 되던 시절이었다.
 
궁벽진 시골집에서 고독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자연을 응시하고, 시집을 베끼고, 어둠을 바라보고, 시집을 읽고, 가져간 민음사판 오늘의 시인총서들은 너덜너덜해졌다. 문학공부란 절망에 대한 헌정이다. 절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를 공부할수록 자신의 재능에 대한 절망이 먼저 다가온다. 절망은 절망을 먹고 자라는 놈이니까 절망할수록 더 절망적이다. 절망을 이겨나가는 방법은 절망에 대해 외면하는 인내뿐이다. 인내는 절망을 이길 순 있지만 내부에 불행을 가졌다. 국어사전의 단어를 베끼거나 시집을 통째로 베끼면, 언어는 점점 자라나는 절망의 몸을 닮는다. 모든 인쇄된 언어의 사원은 그 입구부터 출입이 힘들다. 인쇄체의 성스러움은 외경에 가까워서 시집들은 나에게 경전이었다. 수동타자기조차 없던 그 시절의 문청에게 인쇄체 시집은 목판본 계미자와 다름없는 것이다. 절망과 외경의 시절, 문득 일간지의 신춘문예 공고는 한 소식처럼 반갑다. 아직 깨달음은 없지만, 그 지긋지긋한 몇 개월의 시골에서의 탈출을 나는 꿈꾸고 있었다.
 
그날 밤 급하게 정리한 몇 편의 시들이 다음날 읍내에서 신문사로 부쳐졌다. 그리고 물론 잊어버렸다. 신춘문예 투고는 일종의 자기위로에 불과했던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기에 금방 잊어버렸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전날 이 문학청년의 절망 앞에 전보가 왔다. 매일신문의 신춘문예 입선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풀베기」라는 작품이었다. 겨우 몇 개월의 용맹정진을 통해, 재능 없음을 깨닫고 막 문학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다시 문학 외에 매달릴 것이 무엇 있느냐면서 등을 떠미는 그 소식은 비극일 뿐이다. 뮤즈는 나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 조금 더 두고 보겠다. 열심히 자기를 받들고 헌신한다면 자신의 신민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조금 떼어준 그 재능마저 몽땅 박탈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하여 그해 1월 신춘문예 시상식을 하면서 지방문단으로 먼저 등단을 하였다.
 
 
2.
1977년 지방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1986년 중앙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나에겐 고인 연못 같았다.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의 초침과 시침은 창으로 찌르는 아픔과 비슷했다. 초침이 아니면 시침의 창이 나를 찔렀다. 시침이라고 둔중하거나 느리다고 생각하지 말라. 시침의 소리까지 밤낮으로 생생하게 들리던 그 10년 동안 고요와 서늘함이 나를 늘 소스라치게 해주었다. 하루도 시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날이 있었을까. 한 번도 스스로의 시로 황홀한 한나절이 있었을까. 부패하고 문드러져서 쉽사리 들끓던, 버려진 연못 바닥 같은 10년. 그 10년의 전반부는 대학시절이고 후반부는 공중보건의로 보낸 군대시절이다. 등단의 꿈을 접은 것도 아니지만, 노력에 비해 성과는 아예 없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쓸모없는 수사와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결과이다.
 
쓸모없는 수사는 어떤 책이든 깊이 소화해내지 못한 내 무능력과 편견 탓이다. 무엇보다 바슐라르를 제대로 못 읽은 게 아프도록 아쉽다. 물론 바슐라르를 거치면서 나는 책읽기의 게으름, 삶의 게으름을 이해하게 되었고, 게으름이란 발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라는 데 동의했다. 게으름이란 상상력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을 의기양양하게 외우던 것이 기억난다. 벽난로의 불을 좋아하는 이 프랑스 철학자는 섬세하게 세상을 물과 흙과 바람과 공기로 나뉘었다. 시냇물이 물과 바람의 역동적 상상력으로 나누어진다! 내 눈빛이 갑자기 물활론자의 심리로 바뀌었다. ‘바슐라르연구회’를 만들어 바슐라르를 읽는 소그룹에 나가면서 얼마나 많은 범신론자들이 있는지 확인했던 그 시절 그 당시의 노트를 뒤적거려보면 내 바슐라르 이해는 기껏해야 흙, 물, 공기, 불 등 4원소의 결합이라는 소박한 분석, 희랍인들의 사고에도 미치지 못하는 얇은 수준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여 물과 바람이 결합하면 파도가 치솟아 오른다는 단순한 상상력에 매달렸을 뿐이다. 바슐라르를 새로 읽어가노라면 그 당시 내 생각의 안팎이란 감성적 접근뿐이었다고 생각된다. 바슐라르는 감성이 아니라 서양철학의 바탕 위에서 논리적 접근이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할 터이다. 또한 신화의 세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야말로 상상력과 현실의 결합이라는 그 독특한 세계관에 접근하는 필요조건이 아니겠는가.

바슐라르 못잖게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평론가 김현인데 이 역시 나는 그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 김현의 말단에 매달려 김현이 이해한 시인의 세계에 내려가기보다는 그 미학에만 사로잡혔다. 바슐라르처럼 나는 김현을 아름다움의 교조로만 떠받든 것이다. 그 폐해로 인해 나의 시는 아직까지 수사의 급한 물살에 있다. 강조·변화·비유의 수사란 그 자체만으로 한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 수사와 덧붙여 내 시적 목표는 긴장이었다. 하지만 수사와 긴장의 연마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애매성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명징한 논리와 현실인식을 찾는데 나의 글에는 그러한 부분이 곤충 날개처럼 얇았다.

신춘문예의 꿈 사이에서 1986년 《세계의문학》에 「어두운 날짜를 스쳐서」 외 1편이 실리면서 다시 뒤늦은 등단을 하던 서른 살 근처였다.
송재학
글 | 송재학_시인. 1955년생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기억들』 『진흙얼굴』
『내간체를 얻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