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으면 어김없이 보이는 것은, 부처와 오토바이다. 돌로 만들어진 부처는 한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다. 거무스름한 색으로 목 중간쯤에서 잘려 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다. 몸이 없는 부처를 작은 접시에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명사산 모래를 깔아주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냥 두었다. 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이니 꽤 오랜 시간 내 책상을 지켜주었다. 나를 지켜준 것은 부처의 얼굴이 아니라 목 잘린 부처다. 내가 닿는 지점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의 목이 잘린 자리다.
오토바이는 가볍다. 양철이다. 5년 전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내고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발목까지 오는 노란 줄무늬 양말을 신은, 표정이 없지도 있지도 않은, 어떻게 보면 약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여자가 올라타고 있는 오토바이. 가볍고 경쾌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던 나는 그것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세로로 반이 갈라진 몸통을 이어 붙인 여자여서 코와 입이 약간씩 어긋나 있다. 군데군데 열 수 있을 것처럼 작은 장식도 붙어 있다. 갈라지고 이어붙이고 잠근 부분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좋았다. 책상 위에 두고 자주 물끄러미 보면서 알게 되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시간에 대한 뜨거움이 생겨난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는 길을 갖지 못하는 불구(不具).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서 가볍다는 것.
내게 목 잘린 부처와 부서졌던 여자가 타고 있는 오토바이는 물건이 아니라 정신이다. 나를 글 쓰게 해주는 ‘불구’라는 정신이다. ‘불구’가 내 글쓰기의 스승이다. 불구는 그 뜻 그대로 ‘갖추고 있지 않음’이다. 국어사전은 그것을 “몸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제 기능을 잃은 상태”라고 풀이해놓고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본다면 기형, 장애에 해당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태생적인 것인지 어떤 시간들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려서는 이질적인 느낌을 좋아했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목소리를 가진 아이에게 끌렸다. 남자에게는 남성성보다는 그가 가진 여성성에 끌렸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여자에게는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에 끌렸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물건이나 시간, 공간에서도 그랬다. 소풍을 가서 예상했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면 그만 흥미를 잃었다.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더욱 무언가 부족한 듯한 것이 있을 때, 즉 절룩거리는 느낌이 들 때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그런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나서 미술 전시를 좋아하면서부터다. 온전하게 그려진, 즉 사람다운 사람보다는 사람을 벗어나는, 사람에 못 미치는 그런 작품이 좋았다. 진득진득한 느낌으로 손가락 크기만 하게 작아진 사람. 뼈만 남은 몸으로 눈알을 공중에 띄워 장난스럽게 굴리고 있는 예수. 피카소가 그린 얼굴에 매혹된 것은 오려진 눈코입이 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미술가 마크 퀸의 작품에 보면 장애인을 형상화한 조각들이 있다. 한쪽 팔이 없는 여자와 팔꿈치에서 팔이 잘린 남자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는 모습에서 ‘키스’가 나타났다. 눈알을 굴리고 있는 예수에게서 예수가 나타났듯이. 손가락 크기만큼 작아져 바로 벗겨질 듯한 얇은 비닐 같은 맨살을 보이고 있는 사람에게서 사람을 보았듯이.
불구. 그것을 불균형이라고, 기형이라고, 장애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모자란다고 할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불균형한 것을 보면 심장이 뛴다. 열망이 생긴다. 열망은 꽤 슬픈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어떤 판단이나 가치 이전에 그냥 심장이 먼저 아는 것. 저것에서 시간이 시작되었고 다시 시간은 계속될 수 있으며 저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시간은 나타난다고. 그리고 나라는 시간도 저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구가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구가 아니라는 것을 온전함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면, 온전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열개의 손가락과 열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사회적인 기준에 가까이 가는 삶을 산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온전하다, 갖추었다보다는 다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은 아닐까. 다수의 모습은 다수의 모습일 뿐 그것이 온전하다든지 갖추었다든지 더 나아가 못 갖추었다는 낭패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동일하다는 것은 심정적인 견고함에 속하는 것이지 견고함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균형은 움직임이 찾아들 수 없는 곳이다. 완벽한 곳에는 더 이상 채워 넣을 곳이 없다. 더 이상 시간이 탄생하지 않는다. 불균형은 움직임이다. 시간이다. 운동이다.
불구는 복원되지 않는다. 불구는 잘린 곳을 잘린 곳으로 내내 보는 것. 그 자리를 외면할 때, 다른 것으로 덮을 때, 그 자리를 잊을 때, 즉 자신의 불구를 놓칠 때, 그때, 비로소 세상의 기준에서 말하는 불구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불구를 불구로 잡고 있을 때 불구는 세상의 기준을 벗어난다. 언제부터였을까. 태생적인 것이었을까. 중학교 1학년 겨울 아버지가 죽고 절룩거리게 되면서부터였을까. 부처의 목 잘린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타고 없는 길을 달려가는 것. 그곳에서 불가능한 ‘쓴다’가 매번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