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역
『나무들 비탈에 서다』
2012년 스페인어권 번역부문 대상에 『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 작, 고혜선·프란시스코 카란사 로메로 공역)가 선정되었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작가가 6·25가 발발한 지 꼭 십 년째 되고 4·19 이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던 혼란기인 1960년에 탈고한 작품이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고 정치적 부패와 억압 속에 반항하거나 무기력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당시 젊은 세대들의 표상을 동호, 현태, 윤구라는 전쟁터에서의 충격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젊은이들의 성과 사랑, 폭력과 죽음을 통해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다. 전지적 시점의 화자는 인물들 내면의 느낌을 대화하듯이 풀어쓰며 동호와 윤태의 갑갑하고 고착된 심경과 전쟁 이후의 허무감과 자책감이 “자유의 과잉” 속에서 성충동과 폭력으로 변모되고 생의 의미를 잃어가는 모습을 자유롭게 묘사해 나간다. 전쟁 중에 행군을 하는 동호의 심경이 시적으로 표출된 소설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건 마치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로군. 문득 동호는 생각했다. 산 밑이 가까워지자 낮 기운 여름 햇볕이 빈틈없이 내려부어지고 있었다. 시야는 어디까지나 투명했다. 그 속에 초가집 열여덟 채가 무거운 지붕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려있었다. 전혀 전화를 안 입어 보이는데 사람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곤 무엇 하나 살고 있지 않을 성싶게 주위가 고요했다. 이 고요하고 거침새 없이 투명한 공간이 왜 이다지도 숨 막히게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한여름 고요한 시골의 투명한 공간이 유리 속의 꽉 막힌 공간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전쟁의 포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감과 공포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은 비단 전쟁으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예레미아는 신을 예지했지만 현대의 예레미아는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은 인간의 자유에 달렸다”고 설파하는 선우상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유의 과잉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근대적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본다. 이처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구원의 의미를 처절하게 되물으며 소멸되는 인물들의 굴곡진 모습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고 있는 원작은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식민지배와 전쟁의 폐허로 얼룩진 1950년대 한반도 젊은이들의 모습을 비추며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극복하여 인간의 실존이라는 보편적 물음과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작품의 서두는 작중 주요 인물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먼 훗날 총살대 앞에 서서 아버지를 따라 얼음구경을 갔을 때를 상기하는 문장 이후에 맑은 하상의 돌로 연상되는 마콘도의 시원이 전개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서두를 연상시킨다. 투명하고 열대의 청량제가 되지만 곧 녹아버릴 운명을 지닌 얼음을 통해 마콘도의 묵시록적 운명을 예지한 콜롬비아 작가의 대표작보다 7년 앞서 발표된 황순원의 작품은 유리 안의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억압과 파편으로 온 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예지하고 있다.
이렇듯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종말전쟁』을 연상시킨다. 한 지역의 가장 큰 역사적 상흔인 전쟁과 굴곡진 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보편적 실존과 구원의 의미를 근대성과 더불어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고혜선과 프란시스코 카란사의 유려하고 깔끔한 번역은 1950년대 한반도라는 시공간의 특수성을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지역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게 하고 보편적 구원의 물음에 이르게 한다. 원작이 지니는 내면독백이 삽입된 자유간접화법이 들어간 구절이나 전투 및 인물들 간의 첨예한 대립과 긴장을 다루는 구절이 지닌 템포와 리듬을 잘 살리고 있어서 원작이 지닌 여운을 잘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