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한때 사랑에 빠졌던 일이 있다.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문득 누군가에게 고백해 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들이다.
황홀한 유폐(幽閉) 네 눈을 통해 나는 네 내부 깊숙한 곳으로 잠입한다.
그곳에는 푸른 숲도 있고 하얀 길도 있고 붉은 꽃밭도 있어 우리는 함께
걷기도 하고 누워 별을 보기도 하고 진종일 뒹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을 안다.
나는 놀라 문을 두드리고 발버둥치지만 너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완강히
나를 일상 속으로 내보내기를 거부한다.
나는 황홀하다.
네 머리칼을 통해서, 네 숨결을 타고 개나리꽃이 울타리를 따라 피어 있었다. 마당에는 힘겨우리만큼 꽃을 단
살구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두 노인이 하얗게 빗질이 된 마당에서 감자
씨를 고르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는데 다시 찾았을 때 그 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시 찾아보고 싶다, 나이 서른으로 돌아가, 너와 함께.
네 눈을 통해서, 네 입술을 통해서, 네 머리칼을 통해서.
초등학교 오학년 때 별을 좋아하는 여선생이 담임을 했다. 하루에 한번은
꼭 꿈을 꾸듯 별 얘기를 했다. 카시오페아, 페르세우스 그리고 작은 곰자리,
큰 곰자리. 꿈을 꾸는 것 같은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그 별에도 나 같은
어린이가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별나라들에도 두루 가고 싶다, 네 숨결을 타고.
열 살로 돌아가 네 부드러운 등에 업혀서.
강 언덕에 위태롭게 앉은 집이 사공이 사는 오두막이었다. 다리를 저는 사공이
기우뚱대며 배를 밀 때 그의 딸은 툇마루에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빈대떡을 부쳤다.
나는 종일 그 툇마루에 앉아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강물을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만도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다시, 그 툇마루에 가 앉아 있고 싶다. 네 등 뒤에 숨어.
네 가슴팍 사이에 숨어, 너로 해서 비로소 스무 살이 되어.
재 회 그는 아마 밤새 초원을 달려왔을 테다.
내게 말고삐를 넘기는 그의 머리칼에 반짝 아침 이슬이 빛났을 거다.
그리고 백 년이, 천 년이 지났겠지 우리가 만난 것은.
몸짓도 목소리도 이토록 낯이 익구나.
이 먼 도시를 두 나그네가 되어 찾아왔지만.
말고삐 대신 카메라를 내게 넘기고 활짝 웃는
그의 하얀 팔과 긴 머리칼이 이슬비에 젖어 촉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