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판은 바람이 불어오는 게 참으로 좋았습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여름날에 가끔 소나기를 몰고 오면 바람이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물론 겨울이 되면 바람은 빈 들판을 차갑게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는 빈 들판의 가슴은 아리고 저렸지만 곧 다가올 봄과 여름을 생각하며 바람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빈 들판도 세월이 흘러가는 만큼 늙어갔습니다.
늙은 빈 들판은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습니다.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면 온몸이 얼어붙어 너무나 춥고 외로웠습니다.
‘아, 누구를 좀 따뜻하게 안아봤으면……’
빈 들판은 몹시 춥고 외로운 나머지 누구를 꼭 껴안아보고 싶어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주위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 내가 껴안을 나무 한 그루 없다니……. 지금까지 오직 나 혼자만 쓸쓸히 빈 들판으로 살아왔구나!’
빈 들판은 그제야 자신의 가슴이 온통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람에게 부탁했습니다.
“바람아, 나는 지금까지 나를 비우며 살아오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어. 어떤 스님께서 ‘마음은 차곡차곡 채우는 것이 아니라 텅 텅 비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몰래 엿들은 적이 있거든. 그런데 난 이제 나무 한 그루 없는 빈 들판이 될 게 아니라, 나무랑 함께 사는 들판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그러니까 바람아, 지금이라도 네가 내 가슴에 나무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니?”
“그래, 그렇게 할게.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바람은 봄이 오자 빈 들판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솔씨가 좋겠지?”
바람은 어디 먼 데서 솔씨 하나를 데려와 빈 들판의 가슴에 톡 떨구었습니다.
빈 들판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솔씨를 잘 자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름에는 장마비에 솔씨가 떠내려갈까 봐 더욱 꼭 껴안아주었으며, 겨울에는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에 솔씨가 얼어죽을까 봐 잠시도 쉬지 않고 호호 입김을 불어주었습니다.
솔씨는 빈 들판의 가슴에서 서서히 소나무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빈 들판은 이제 빈 들판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내 가슴에 소나무가 자라니까, 난 이제 빈 들판이 아니야. ‘빈’자를 뺀 그냥 들판이야.”
빈 들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소나무를 더욱더 애지중지했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분다고 걱정하고, 조금만 햇볕이 따갑게 내리쪼여도 햇볕이 내리쪼인다고 걱정했습니다.
빈 들판의 그런 정성스런 마음 때문에 소나무는 해가 갈수록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소나무는 어느새 젊은 소나무로 늠름하게 자랐습니다.
소나무에 대한 빈 들판의 정성도 더욱 각별해졌습니다.
“얘야, 밤늦게 별을 바라보지 말아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건강에 좋아.”
“그렇지만 이슬에 너무 젖어서는 안 된다.”
“개미들의 날카로운 이빨도 조심해야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바람을 조심해. 엄만 저 바람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단다.”
그러나 소나무는 ‘엄마’라고 자칭하는 빈 들판의 관심과 사랑이 싫었습니다. 아니, 그 잔소리가 싫었습니다.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귀가 따가워죽겠어요.”
한번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으나 빈 들판은 잔소리하는 일을 쉽게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중략)
* 본 작품의 전문은 <대산문화> 2003년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정호승
글 / 정호승_1950년생.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동화집 『항아리』 『연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