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비극은 누가 만드는가?

-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 vs 영화 <안티고네>

  • 원작 대 영화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비극은 누가 만드는가?

-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 vs 영화 <안티고네>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들을 2010년 『그리스 비극 걸작선』(숲)으로 펴내면서 천병희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는 서문에서 그리스 비극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살아있는 이슈로 우리 곁에 있는 심연이다.”
2,500년 전 신과 인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박한 문제 제기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 비극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분히 신화적이고, 단조롭고, 과장된 연극(희곡)이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어쩌면 인류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의 원형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해 그리스 비극은 끊임없이 탐구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다양한 상상력의 옷을 입혀 다시 살아나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비극의 불멸성, 현재성
그리스 비극을 신에서 인간 세상으로 끌고 내려온 사람은 소포클레스였다. 그는 완전히 신에게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신을 주인공으로,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만 했던 ‘창시자’인 아이스킬로스를 따르지 않았다. 신 대신 인간을 주역으로 삼아 인간의 존재와 인간 사회의 한계와 모순과 부조리가 야기하는 비극을 연출했다. 신화란 것도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인간세계에 성찰과 교훈이지만, 무대에 인간을 올림으로써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살아있는 이야기로 만들었고, 인류가 살아있는 한 이야기에 꺼지지 않은 생명을 불어넣었다. 때문에 그의 비극은 단순한 고대의 재연이나 반복이 아닌, 언제든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가치와 만날 수 있었다.
『안티고네』도 그렇다. 그리스 시대의 전형적이면서도 가족 비극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여동생인 안티고네의 용기와 선택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을 담아냈다. ‘거슬러 걷는 자’란 의미인 안티고네란 이름에서 이미 비극은 예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비극이 단순한 한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도 추측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다. 안티고네가 어긴 것은 왕인 외삼촌 크레온의 포고령이고, 그녀가 죽음을 각오하고 행한 것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수습이다. 크레온은 왜 폴리네이케스의 장례 금지명령을 내렸나. 서로를 죽이고 죽은 형제이지만 동생인 에테오클레스와 달리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자로서는 당연한 결정인지 모른다. 더구나 크레온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애국’이다. 그는 조국보다 친구를 소중히 하는 자를 경멸하며, 조국의 적을 절대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조국의 땅과 선조들의 신들을 화염으로 송두리째 불살라 없애고, 친족의 피를 마시고, 법규를 말살하려 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새떼와 개떼의 밥이 되게 버려두라.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 죽음으로 다스리겠다.’
그는 자신을 가장 이성적, 이상적 존재라고 믿는 독재자이다. 따라서 도시가 임명한 자(자기 자신)가 명령하면 크고 작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모두가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불복종보다 더 큰 악은 없다. 복종만이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에 법질서를 무조건 옹호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부모의 비극적 파멸로 ‘고통과 재앙, 치욕과 불명예’를 겪은 비운의 안티고네에게 오빠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죽은 가족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운명의 선택’이며, ‘경건한 범행’이고,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이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왕의 포고령이 그 불문율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그녀는 한 인간(크레온)의 의지가 두려워 그 불문율을 어겨 신들 앞에서 벌받고 싶지 않다.
『안티고네』는 파수꾼, 코로스, 안티고네의 약혼자이기도 아들(하이몬)의 입을 빌려 크레온에게 이렇게 한탄하듯 충고한다.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깝고 먼 미래에도, 과거에도 유효하리라, 인간의 성공에는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법은.”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면 속이 비어있음이 드러나지요.”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뒤늦게 눈먼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나 무서운 예언을 하자 겁에 질려 자신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안티고네도, 하이몬도, 아내인 에우리디케도 목숨을 끊은 후였다. 『안티고네』가 비극이며 현재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레온이 탄식했듯이 ‘분별없는 생각의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가 빚은 비참한 파멸이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이 가장 큰 재앙임을,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모습만 달리할 뿐 지금 우리의 세상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안티고네』가 비극적인 것은 그렇게 인간의 법이 아닌 하늘의 법을 따르려는 안티고네가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예외 없이 여전히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가 영화로 가는 두 길
그리스 비극이 영화로 가는 길은 2천500년 전의 그곳으로 돌아가든가, 인물과 시간을 현재의 우리의 삶 속으로 걸어 나오게 하든가 이다. 물론 어중간하게 그 중간쯤에 서버리는 것도 있지만 어디에서 누구를 선택하든, 살을 붙이고 색칠을 하든 원작의 비극성과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영화 <안티고네>는 알제리를 탈출해 캐나다로 온 한 이민자 가족에게 이 비극을 투영시켰다. 비극의 크기와 색깔이 원작과는 그리 가깝지 않고 이야기의 크기도 작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안티고네>라고 하고, 인물들의 이름까지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마도 그리스 비극이 가진 ‘원형’과 그것의 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에서 안티고네(나에마 리치 분)는 세 살 때 조국에서 부모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고 나서 할머니와 두 오빠, 여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해 10년 넘게 살고 있는 열일곱 살의 소녀가 됐다. 그리고 어느 날 큰 오빠 에테오클레스가 거리에서 경찰 총에 죽고, 그 현장에 같이 있던 작은 오빠 폴리네이케스가 경찰 폭행으로 체포되어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오빠를 탈출시키고 대신 감옥에 갇힌다. 그 선택을 그녀는 “심장이 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의 안티고네가 그랬듯, 인간의 법이 아닌 마음의 법(신의 불문율)을 따름으로써 ‘산 채로 무덤에 갇힌’셈이다. 절대 권력자인 크레온이 없는 지금에도 안티고네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그 운명을 통해 영화는 이방인에 대한 법과 제도, 사회의 편견과 차별, 그것이 가진 비극성과 연속성을 날카롭고 우울하게 드러낸다. 법과 제도에는 영혼이나 감정이 없기에 안티고네의 심장이 시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안티고네에게 진실은 가족이다. 때문에 오빠가 마약조직원이어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법을 다시 어길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합창대 ‘코로스’처럼 영화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SNS로 그런 그녀를 비난하다가, 응원하고, 거리에서 ‘놀이’하듯 그림과 치장으로 시위를 하고, 법정에서 절차를 고집하는 판사를 조롱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안티고네는 결국 할머니와 다시 붙잡힌 오빠와 함께 ‘산 채로 무덤(알제리)’으로 쫓겨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혼자의 힘으로는 마음과 인간들의 법 사이의 싸움은 풀 수가 없고, 안티고네의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그 악순환을 무엇으로 끊어낼까. 영화 <안티고네>는 방청객들이 법정을 비웃으며 낸, 알제리로 돌아가려 공항에 도착한 안티고네가 과거의 자신, 아니면 또 다른 어린 안티고네를 만나면서 다시 들려온 ‘휘파람 소리’에 희망을 건다. 한 번의 해프닝이고, 약하지만 그것이 ‘혼자가 아닌 함께’의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으로 영화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을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다.
이대현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아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