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눈물을 연기하는 눈물 없는 신파극

  • 근대의 풍경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눈물을 연기하는 눈물 없는 신파극

신파, 시대착오적이라 치부되어도 이 말은 아직 살아있다. 나이 든 사람은 “홍도야 우지 마라~”를 흥얼거리거나 <미워도 다시 한번>의 기억을 품고 있겠지만, 젊은 사람도 ‘신파’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다. <7번방의 선물>이나 <신과 함께-죄와 벌> 혹은 최근 <반도>에 이르기까지, 과하게 흘러넘치는 감정 표현을 마주하면 신파 딱지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요즘은 유독 ‘오글거리는’ 표현을 꺼리는 데다가 그런 장면을 일상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대중예술이 종종 구사하는 이 과잉이 이상해 보이고 순수해 보일 리 없다. 미학적 완결성을 해치면서까지 마련한 그 부자연함이란 상업적 성공을 위한 마케팅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파는 거슬리거나 지워내야 할 무언가를 대표하는 말로서 여전히 유효한 중이다.
백 년이 넘는 신파의 역사에서 그 예외적인 시절이 있다면 그때는 신파극이 ‘뉴웨이브[新派]’를 이루던 1910년대뿐일 것이다. 원래 신파는 ‘구파’ 가부키의 대타적인 위치에서 시작한 소인극이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전성기를 맞이한 1900년대 중후반의 일본 신파극에서 유래된 것이다. 1906년 일본의 통감부 정치가 시작되면서 일본 거류민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을 위한 흥행장이 명동・충무로 일대에 들어서면서 신파극이 공연되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조선인들이 속속들이 단체를 조직해 같은 이름으로 공연한 것이 한국 신파의 기원이다.

 

임성구(매일신보,1914.02.11.)

고수철(조광, 1935.12.)


임성구(林聖九, 1887~1921)는 그 선구적 존재다.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깨우쳤을 뿐 어떤 근대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그의 백형 임인구와 함께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뒷문 근처에서 과일가게를 하던 이 평범한 청년이, 일본인 극장에 드나들다가 마침내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을 조직하여 신파 시대를 연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의 통치가 본격화하면서 문화적 재편이 시작된 상황이었고, 신파극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경영의 차원에서 은밀히 장려한 공연예술이었다. ‘혁신단’의 출현으로 개화한 신파극은 식민지적 근대로의 전환기에 놓인 대중의 다양한 심미적 요구와 재빠르게 결합했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이 일본 유학생 출신의 윤백남(尹白南)・조일재(趙一齋) 등의 ‘정통’ 신파극보다 ‘무식한’ 임성구의 연극을 더 환호한 사실이다. 모방으로 시작했으나 모방에서 점점 멀어져 간, 내용이든 형식이든 과감하게 가공한 임성구 식의 연극을 관객은 선호했다. ‘무식’했으나 비굴하기는커녕 자존심이 강했던 임성구, 어쩌면 그의 동력은 애국계몽기의 끝자락에서 품은 나름의 소명 의식일지도 모른다. ‘혁신단’ 창립 이념인 ‘권선징악(勸善懲惡)・풍속개량(風俗改良)・민지개발(民智開發)・진충갈력(盡忠竭力)’ 혹은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한 레퍼토리가 심상하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다. 교육기관이나 걸인을 위한 자선 공연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안타깝게도 일정한 대본 없이 레퍼토리를 준비하는 ‘구치다데[口立て]’ 방식이었던 탓에 당시의 신파극은 『매일신보』의 기사나 회고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에 매혹되었을 관객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신파극은 처음 보는 종류의 공연이었고, 이 새로움은 형식의 이국성과 내용의 동시대성에서 나왔다.

혁신단의 걸인잔치 기념(매일신보, 1914.02.04.)

 

혁신단의 <눈물> 공연이 있던 연흥사 장내(매일신보, 1914.01.29.)원 안은 공연에 출연 중인 배우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임성구     

 

공연 시작 전에 주연급 배우가 나와 개막 인사를 하면서 그날의 공연 개요를 설명하고, 막이 바뀔 때마다 앞의 내용을 요약해 주며, 마지막 막을 남겨두고는 단장이 나와 인사말과 연극론 그리고 당일 연극의 결론과 이튿날 공연을 홍보했다. 종래의 연행예술과는 판이한 ‘신파극’과 그 레퍼토리를 생소하게 여겼을 관객의 이해를 돕고 선전 효과를 높였다. 일본 신파극이 받아들인 가부키 흔적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일본인 극장에는 무대 오른쪽 끝에서 1층 객석으로 돌출한 경사 무대 ‘하나미치[花道]’가 있었는데, 이곳을 주연배우를 돋보이는 등・퇴장로로 삼았다. 인물의 등장을 알리는 북이 울리면 관객은 일제히 이곳을 쳐다보고, 잠시 후 북 장단에 맞춰 걸어 들어오는 배우를 발견하는 식이다. 남자가 여역(女役)을 맡는 ‘온나가다[女形]’ 배우의 존재도 이 시대의 이채로움이다. 고수철(高秀喆)이 유명했다. 그때까지는 여성이 무대에 오를 수도 없었던 터라 온나가다 배우의 연기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레퍼토리도 새로웠다. 고전의 세계를 극화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동시대의 인간을 다루면서 당대의 정치적・윤리적 쟁점을 함축했다. 동요하는 근대의 혼란스러움, 흔들리는 주체의 위치, 불확실한 이념과 전망,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신파극이 상상한 것은, 명료한 도덕의 세계였다. 그 초기에 군인・경찰・은행가・교사・학생 등 신종신분을 지닌 남성 주인공의 입지전적 성공이라는 ‘신’영웅담을 그려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의 억압과 욕망을 표현한 수난 서사가 신파극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그리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려진 <장한몽(長恨夢)>도 바로 이때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신파극이 미학적 규범을 지닌 공연양식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신파극은 극단에 따라 혹은 제작의 조건과 상업적 필요에 따라 여러 형식적 요소의 넘나듦이 탄력적인 새로운 볼거리였으며, 특이한 공연방식 상당 부분은 1920년대에 가면서 거의 사라졌다. 어떤 측면에서는 레퍼토리조차 볼거리였다. 신파극이 ‘눈물’을 ‘연기’할 수는 있어도, 후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으레 상상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장안의 온갖 한량과 부랑배가 모여들고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성적(性的) 거래도 이뤄지던 곳, 정숙하고 엄숙하기보다 이 새로운 공연을 시끌벅적하게 즐기던 곳이 당시 극장의 풍경이었으니,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공감의 눈물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랬던 신파가 어떻게 해서 여태 살아있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신파는 190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연극’인데, 그로부터 1세기가 넘는 동안 ‘말’은 그대로이되 일본 신파를 넘고 연극을 넘어 보편적으로 호소력 있는 감정 문화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신파극이 미숙하거나 타락한 통속물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부터 이를 제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헛수로 만든 그 질긴 생명력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분기점은 3.1운동 이후 탈식민화의 기대와 그 좌절을 연쇄적으로 경험한 1920년대이다. 신파는 이제 고상한 근대적 예술의 윤리적 목표에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세속적인 것들을 저장하는, 말하자면 진보의 잉여였다. 이는 대중예술이 감당해 온 몫이기도 하다. 1910년대 레퍼토리의 일정한 속성이 활성화되어 신파의 계보를 이뤄 간 것도 이런 맥락에 있을 것이다.
무언가의 기원을 묻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 모른다. 모방에서 출발한 신파와 지금의 신파는 얼마나 다른지! 다만, 어떤 연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파가 약자의 메시지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분명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억눌린 존재가 과장하지 않으면 결코 들려줄 수 없는, 세상을 향한 감정의 웅변! 신파의 호소력이 여성 수난 서사에서 빛을 발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분이 미천하고 무학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공공연히 자신을 멸시한 엘리트들에 대해 당당했던 임성구, 이미 신파의 운명은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트로트 열풍이 한창이다. 한동안 시대착오적인 변두리 서민예술로 격하되었으나 이제 대세가 되어버린 노래의 메시지가 신파일지 가끔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이승희
이승희
한국 근/현대연극사 연구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1967년생
저서 『숨겨진 극장―식민지 흥행장의 치안과 검열』, 『한국 사실주의 희곡, 그 욕망의 식민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