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내 생애를 지시하는 나침반

- 1967년 신춘문예 당선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나의 데뷔작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내 생애를 지시하는 나침반

- 1967년 신춘문예 당선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나의 데뷔작은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이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다.
지금이야 꼭 그렇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신춘문예가 모든 문학 지망생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등단방식이었다. 심사위원은 조지훈, 박남수, 김종길 선생이었다. 나는 그 전해에 동아일보에 동화가 당선되었고 1969년에는 소설도 대한일보에 당선되었으니 신춘문예의 혜택을 아주 많이 입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신춘문예 3관왕’이라는 영예가 평생 동안 나에게는 큰 짐이 되었다. 화려한 등단이 오히려 무거운 멍에가 돼버린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깜깜 몰랐었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너무너무 훤히 알고 있다.
이 시는 홍릉에 사는 고종사촌 형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대학을 다니던 때의 상황을 서사적인 틀 속에 표현한 작품이다. 다음 학기에 등록을 하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가난한 시기였다. 나는 그때 조카들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이층 다다미방에서 기거하였다.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피웠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난로 연통에서 빠져나간 연기와 난로 위의 주전자가 뿜어내는 수증기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갔다가 찬 공기에 눈송이가 되어 지금 온 도시의 숲과 지붕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는 순간적인 시적 터무니가 떠올랐던 것이다. ‘원시림-석탄-눈’으로 이어지는 시적 변용이 그때 왜 일어났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영 알 수가 없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 천년 동안 땅에 묻혀 /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나 “이층 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같은 표현은 젊은 날의 엉뚱한 상상력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참 희한한 것이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 겨울 아침의 행인들”이라는 첫 연을 보면, 눈을 단순한 배경요소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어떤 매개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을 의인법이니 직관적 상상력이니 하면서 허풍떠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비평적 수사일 뿐이다. 그때 이 시를 쓸 때, 내 눈에 그냥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썼을 뿐이다. 내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여서!
젊은 날에는 소설을 더 열심히 쓰다가 불혹을 넘기면서 오로지 시를 쓰는 시인으로 여태껏 살고 있으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는 나의 생애를 지시하는 나침반이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우주 저 멀리까지 순간적으로 왕래하면서, 아직 말이 채 되지도 못한 옹알이를 하는 병아리 시인의 미래를 일러주는 신비한 자동항법장치라고나 하겠다.
1960년대는 우리 사회가 모두 너나없이 굶주리는 극한의 시대였다. 식민-해방-전쟁의 참혹한 과정을 지나면서 분노와 좌절이 일상화되어 미래의 꿈은 꿈꾸는 것 자체가 사치요 어불성설이던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데뷔작에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희망의 메시지가 은연 중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 가운데 /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에서 볼 수 있듯, 절망 속에서도 밝은 미래를 꿈꾸는 어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구러 나의 데뷔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태어난 1967년 새해 아침이 내 문학의 영원한 강보가 되었다.
오탁번
오탁번
시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43년생
시집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