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역병의 시대, 한국소설을 호출하다

  • 이 계절의 문학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역병의 시대, 한국소설을 호출하다


‘2020년이 사라졌다.’ 지난 한 해를 이렇게 돌아보는 주변 사람들이 꽤 많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이 미증유의 현실 탓일 것이다. 숨쉬기 힘들었던 마스크도 처음엔 눈치가 보였던 재택근무도 시간이 지나며 어느덧 일상이 됐지만, 이 끝을 알기 힘든 ‘격리의 시간’만큼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신문사 문화부에선 문화계 연말 결산 기사를 준비하는데, 작년 말 “<기생충>이 오스카를 휩쓴 게 올해 초”라는 동료의 말에 다들 “그게 올해야?”라며 잠시 어리둥절했던 일도 있었다. 떠들썩했던 축제의 기억도 팬데믹이 휩쓸어 날려 보내듯, 2020년은 그렇게 맥없이 지나가 버렸다.
 서두부터 코로나19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계절의 문학’이라는 코너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 역병의 계절이 좀처럼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말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 가운데 하나는 문화계 전반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와중에도 도서 판매량은 늘었다는 서점가의 집계다. 특히 부쩍 늘어난 한국소설 판매량이 눈에 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인의 집단 번아웃 상태를 보여주는 듯한 표지와 제목 일색이었던 에세이 분야는 판매량이 줄어든 반면, 한국소설 판매량은 역대 최다를 기록(교보문고, 1~9월 기준)했다고 한다.

 


한국문학 호출한 독자들…여성 작가 활약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해였다. 정세랑, 김초엽, 손원평, 이미예 등 젊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교보문고가 발표한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30위 내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30위 중 27종이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특히 정세랑은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제작된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 지난해 출간한 장편 『시선으로부터,』 등 한국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30위 안에 무려 5권의 소설을 올리며 2020년이 ‘정세랑의 해’임을 보여줬다. 신동엽문학상(김유담), 이효석문학상(최윤), 심훈문학대상(장류진), 김승옥문학상(김금희), 대산문학상(김혜진), 문지문학상(임솔아), 현대문학상(최은미) 등 하반기부터 차례로 발표된 주요 문학상들도 여성 소설가들이 휩쓸다시피 했다.
 매주 새로운 신간이 쏟아지고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도 매일같이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돌아보면 2020년에도 변하지 않은 출판계의 확고한 흐름은 여성, 그리고 페미니즘이었던 것 같다. 여성의 일상에 드리워진 불안을 감지하거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직시하고, 또 이를 뛰어넘는 연대와 상상력을 보여주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독자들의 시선이 닿아 있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서사의 바람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었음을, 2020년의 여성 작가들이 증명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소설 붐’은 올해도 지속될까. 올해 출간 대기 중인 작품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기대를 가져볼 법 하다. 우선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상반기 5년 만에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로 돌아온다. 2015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단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2018년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작별」에 이은 작가의 ‘눈(雪)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이승우·성석제·하성란·김숨 등 중견 소설가들의 신작은 물론,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동시에 받은 젊은 작가들의 소설도 출간이 예정돼 있다. 특히 단편으로만 독자를 만난 작가들의 ‘첫 장편’이 기대를 모은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다수의 팬층을 확보한 최은영은 증조모로부터 이어지는 4대의 삶을 비춘 첫 장편 『밝은 밤』을 선보일 예정이고, 데뷔작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화제를 일으킨 장류진 역시 첫 장편 『달까지 가자』를 선보인다. 『대도시의 사랑법』 등을 펴낸 박상영, 『소녀 연예인 이보나』 등을 쓴 한정현도 첫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팬데믹 시대의 문학
코로나19의 국내 확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한 출판사 관계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른바 ‘집콕’의 시간이 길어져도 독서보단 유튜브나 넷플릭스 시청 시간만 늘어나지 않겠냐는 조금은 자조 섞인 이야기였다. 책도 ‘스트리밍 시대’라고,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 핵심만 읽어주는 유료 서비스도 이젠 낯설지 않을 만큼 독서도 ‘효율적으로’ 하는 풍조에서 씁쓸하지만 일견 설득되는 얘기였다.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필자가 종사하는 신문산업의 위기만큼이나 오래 들었던 말이고, 어쩌면 허구의 이야기보다 더 거짓말 같은 현실을 모두가 통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타인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이 역병의 시대에, 독자들이 다시 문학을 호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로만 기억되고 누군가에겐 ‘통째로 사라진’ 2020년이었다고 할지라도, 문학을 통해 위로받은 기억은 마음 한편에 남지 않았을까.
팬데믹의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감은 감염 공포보다는 어쩌면 다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함께 먹고 마셨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 것이다. 문학이 타자에 대한 글쓰기이기도 하다면 타자와의 접촉이 소멸한 시대, 문학은 또 어떤 세계를 담아내고 어떤 방식으로 그 세계와 호흡할 수 있을까.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체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두 번째 봄을 맞으며, 새 계절의 한국문학을 기다려 본다.

선명수
선명수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85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