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①강물을 읽다

  • 글밭단상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①강물을 읽다

저무는 강가에 나와 눌연(訥淵)의 수면을 마주하고 앉는다. 해는 서산마루에 지친 무릎을 세우고 서둘러 잎을 버린 겨울나무들 또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나보다 먼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갈대는 바람의 기미를 읽고 새들 또한 어둠의 두께를 가늠하며 쉴 곳을 찾아들었다. 부산하던 하루를 정리하고 모든 물상 하나하나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 같은 시간과의 조우야말로 시골살이의 선물이 아니랴.
돌아보면 20년 전 내가 이곳에 매료되어 터를 잡고 작업 공간을 만든 단초를 제공한 곳이 이 눌연 아니던가. 눌연, 흘러가던 강물이 한 번 더듬어서 다시 흐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작은 소(沼)의 다른 이름이다. 일찍이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시문과 풍류를 즐기며 ‘운문구곡’을 경영하였던 소요당 박하담 선생의 시구 가운데 나오는 지명이다. “강물이 말을 더듬다니……” 시나브로 지나는 곳이면서도 그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막힌 착상에 고개를 숙이게 하는 사유의 서책 공간이다.
사실 처음에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화폭에 옮기고 시상을 원고지에 옮기기에 차별화된 경승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섰다. 더하여 ‘무이구곡’을 경영하며 자연에 동화하고자 한 주자나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율곡과 퇴계의 자세를 모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재현하지 않는 강을 관찰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책으로 묶어진 논리적 가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신령한 질서를 체감하면서 기존의 책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기록한 것이 종이책이었다면 자연은 미래를 향한 지혜의 보물창고와 같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물은 내게로 오면서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마치 불립문 경전과 같은 배역을 감당해 주었다.
잠시 지나간 시간을 뒤적이는 동안에도 물색은 보다 무거워지고 목소리를 조금씩 키우고 있었다. 내가 쉽사리 내려놓지 못한 섭섭함이거나 매듭짓지 못한 작품의 방향, 심지어 현기증을 일으킨 부고 같은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헤집어놓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갈 뿐이었다.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물의 책장을 넘겨갔다.
강물은 서로 먼저 내려서서 키높이를 맞추어 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수만 년 내려서고 또 내려서서 키를 자랑삼지 않았다. 강물은 맑은 물과 더러운 물을 분별하지 않았다. 붉은 물과 푸른 물이 손을 덥석 잡고 하나되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강물은 장애물을 핑계로 역류하지 않았다. 작은 돌이 가로막으면 작은 소리로 노래하고 큰 바위가 가로 놓이면 큰 소리로 노래할 뿐 함부로 좌절하지 않았다. 언제나 삼가며 생명의 젖줄로서 삼라만상을 일으켜 세우지만 스스로 빛을 내세우지 않았다. 함부로 시기하지 않으며 어설픈 분별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기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지 않았던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풀이되겠는데 노자(老子)의 『도덕경』 8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 물이 지닌 겸손과 공평과 본질 불변의 완전체야말로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의 가치 덕목이자 이상적 실천과제가 아니랴.
강물의 책은 이처럼 객관식이 없는 주관식 문장이다. 함부로 읽으면 세상이 혼탁해질 것이고 지혜롭게 읽으면 사람이든 물이든 아래로 흐르고 흘러서 하늘에 이르기 마련이다.
민병도
민병도
시인, 화가, 1953년생
시조집 『슬픔의 상류』 『장국밥』 『들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