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②무급휴가

  • 단편소설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②무급휴가


1.

현주는 그 방을 미리의 방이라고 했다. 그런 현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리가 그린 그림이 표구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현주와 현주의 고양이 올빼미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다시 보기 전까지 미리는 자신이 그걸 그렸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걸 그렸던 때가 떠올랐다. 창문으로 가로등이 가까이 보이던 언덕 위 현주의 방, 휴일이 되면 그곳에서 잠을 몰아 자곤 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던 올빼미의 감촉과 올빼미의 부드러운 발바닥에서 나던 따뜻한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국에 들어와 자가격리를 해야 했던 십오 일 동안 미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고 마지막 사흘은 밤마다 울었다. 미리는 생각을 줄이려고 십 년 전에 봤던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 몰아 봤다.
그러고도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어서 작은방을 불안하게 왕복했다. 현주는 이런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미리는 창밖으로 내리는 장맛비를 바라보며 현주를 생각했다.
현주는 미리의 격리가 끝나는 날 검은색 아반떼를 몰고 와서 미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육 개월 전에 다시 연락을 시작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본 건 삼 년 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현주는 짧은 머리에 깡마른 모습이었는데 그사이 얼굴에 살이 붙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하나로 묶고 있었다. 눈가에 예전에는 없던 잔주름이 보였다. 시력이 나빠졌는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삼 년 전에 크게 싸웠다. 그간 크고 작게 싸웠지만 그때의 싸움은 달랐다. 현주는 그 이후로 미리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미리도 그런 현주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현주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 시간 동안 미리는 진심으로 현주를 미워했다.
어느 날 같이 사는 언니 중 한 명이 미리에게 그런 말을 했다.
부부 싸움하고 매번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대.
그 말을 듣고 미리는 열 번을 싸우면 여덟 번은 먼저 사과하던 현주를 떠올렸다. 미리야, 미안해. 마음 풀어. 미리는 먼저 죽는 사람은 현주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든 날 꿈에 현주가 나왔다. 꿈에서 현주는 춥고 어두운 밤에 외투도 없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꿈을 꾸고 일어난 곳은 비행을 마치고 잠시 눈을 붙인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이었다. 미리는 호텔 로비에 무료로 비치된 엽서에 미안하다고, 네가 보고 싶다고 적어서 현주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가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주가 스카이프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현주는 미리가 바로 전화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한국은 새벽 세 시라고 했다. 그날 미리와 현주는 오랫동안 통화했다.
현주는 미리의 엽서를 받기 며칠 전에 일 년 동안 투병하던 올빼미가 죽었다고 했다. 현주는 올빼미를 데리고 병원을 옮겨 다니며 처치를 받아야 했던 일, 어렵게 약을 먹여야 했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전에 미리 울어두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게 꼭 당연하고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마도 몇 개월 안에 휴가가 나올 것 같으니 그때 한국에서 보자고 말했을 때만 해도 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바이 공항이 폐쇄될 줄 몰랐다. 동료들이 권고사직을 당하고 자신도 불안하게 대기하다 기약 없이 한국으로 보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사이 현주는 서울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의 주택을 매매하여 그곳으로 이사 갔다. 미리가 당분간 한국에서 지내야 한다고 하자 현주는 집으로 오라고 했다. 여기에 미리의 방이 있다면서.
미리는 현주의 제안이 고마웠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예전에 같이 일하던 언니가 광주에서 식당을 열었다면서 연락을 줬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면 광주로 내려오라고 말하며 팔월 첫째 주까지 답을 달라고 했다. 격리가 끝난 건 칠월 셋째 주였다. 미리는 격리 기간 동안 고민을 하다가 현주에게 연락을 했고 격리가 끝나자마자 현주의 집으로 왔다. 무엇보다도 현주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현주의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한참 낮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벌써 다섯 시였다. 갈증이 났다. 밖으로 나가보니 현주가 부엌에 서서 쌀을 씻고 있었다.
“잘 잤어? 배고프지.”
“응. 배도 고픈데 목말라서…… 물 어디 있어?”
“물이야 냉장고에 있지. 그냥 꺼내서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
현주가 시원한 보리차를 잔에 따라 미리에게 건넸다.
“컵은 여기 있고, 접시는 저기 위쪽에 있어. 냄비랑 프라이팬은 아래쪽에. 라면이랑 통조림 같은 건 냉장고 옆 수납장에 있어. 과자랑 차도 거기 있고.”
현주가 수납장 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내가 할 거야. 넌 더 쉬고 있어.”
“그래, 그럼 설거지는 내가 할게.”
현주는 무쇠 냄비를 꺼내서 콩나물밥을 짓고 묵은지를 넣은 청국장을 끓였다. 콩나물밥에 넣어 먹을 양념장을 만들고 감자를 볶고 고등어를 굽고 상추와 깻잎과 오이고추를 깨끗하게 씻었다.
“콩나물밥이네.”
“응. 여기 양념장 넣어 먹어.”
현주는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반찬을 이것저것 미리 쪽으로 몰아주면서 정작 미리의 얼굴은 잘 쳐다보지 못했다.
“몇 년 만에 먹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한솥 도시락에서 자주 사 먹었잖아. 콩나물밥 도시락.”
미리가 말했다.
“그랬었지. 먹고 나면 한 시간 만에 배가 꺼졌어.” “맞아.”
둘 다 두 공기씩 밥을 먹고 냄비에 눌어붙은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숭늉을 마셨다. 미리가 격리되었을 때의 이야기, 두바이에서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동안 현주는 별말 없이 밥을 먹으면서 미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혼자 사는 건 이제 좀 어때? 일도 집에서 하고 답답하지 않아?”
미리가 물었다.
“적응 중이야.”
“외롭진 않아?”
“응…… 이쯤 외로운 건 감수해야지.”
자신의 질문에 현주가 불편해하는 걸 알아채고 미리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난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잖아. 근데 앞으로는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몰라서 물어본 거야. 다른 게 아니라.”
“알아.”
현주가 미리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작업은 잘 돼가?”
미리가 물었다.
“맨날 똑같지. 요즘은 밖에 잘 못 나가니까…… 그래서인지 작업도 잘 안 풀리는 것 같아. 핑계겠지만.”
“최근 작업 보니까 네가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서 좋더라. 너답고. 네가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현주의 대답에 미리는 놀라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예전의 현주 같았으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엉망이야, 라고 말했을 것이다. 더 오래전이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거, 라며 자기 작품을 무시했을 것이다. 현주의 말이 매번 미리의 신경을 긁었던 건 그것이 그저 겸양의 포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가 있는 호평은 결코 믿지 않았고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평가에만 진실이 있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런 태도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네가 이렇게 인정하니까 내 마음이 다 좋다.”
미리의 말에 현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력하고 있어.”

2.

현주의 집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는 비가 그치고 거실의 큰 창문에서 따뜻한 햇볕이 쏟아져 내려왔다. 창밖으로 건너편의 동산과 마당의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창문은 빗물 모양의 먼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올빼미가 저기 있어.”
현주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저기 나무 보이지.”
“마당에 있는 거?”
“응. 저거. 나가볼래?”
미리는 현주를 따라 마당으로 갔다. 현주는 초록색의 작은 열매들이 달린 나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바닥으로 흙을 토닥였다. 그 아래에 올빼미가 묻혀 있는 거였다.
올빼미는 다정한 고양이었다. 미리가 현주의 집에 가면 통통통 달려와서 그녀의 다리에 자기 머리를 박고 만져달라고 앞발로 툭툭 치곤 했었다. 삼 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미리를 알아본 듯 배를 보이며 잠을 잤다.
현주는 올빼미와 십오 년을 같이 살았다.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추웠던 소한(小寒)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현주의 자취방으로 따라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거였다. 꼭 새끼 올빼미처럼 생겨서 미리가 올빼미라고 부른 것을 현주가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부모님이 남해의 한 마을로 귀농을 간 이후에 올빼미는 실질적으로 현주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덥다. 들어가자.”
현주가 손을 털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요즘 그린 거 볼래? 어제 작업실은 안 보여준 것 같아서.”
“봐도 돼?”
“그럼. 나 손 좀 씻고 갈게.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미리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현관 옆에 있는 작업실을 향해 걸어갔다. 현주는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갤러리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자기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현주가 미술사 석사과정을 다닐 때였다. 그날 미리는 현주의 집에 갔다가 세탁기 위에 놓인 흰 천을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천을 옆으로 치우니 캔버스에 반쯤 그리다 만 그림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현주가 그린 그림이었다.
너 뭐해?
현주가 그렇게 말하면서 천으로 그림을 가렸다.
그냥 네 그림 보려고……
저리 가.
그렇게 말하는 현주의 얼굴과 목이 울긋불긋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현주는 허물없이 미리에게 그림을 보여줬었기에 현주가 그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좀 보면 안 돼?
저리 가라고.
현주는 미리의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현주의 얼굴만큼이나 자기 얼굴도 붉어졌으리라고 미리는 생각했다.
당시 현주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미술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첫 전시회를 하고 작품이 팔리기 시작할 무렵에도 현주는 학원에서 일을 했다. 그때는 현주도, 미리도 현주가 전업으로 그림만 그리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미리만큼이나 현주는 현실적이었고 헛된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주는 자신의 길을 냈다. 자신과 잘 맞는 갤러리를 찾았고 그들을 설득했다. 첫 전시회에 걸린 그림들은 전시회 도중에 거의 다 팔렸다.
현주는 비밀스럽게 작업했지만 남자친구에게는 자기 작품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주는 미리에게 남자친구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그림을 많이 봐온 사람이어서 믿을만하다고 했다. 그 믿을만한 비평이라는 것이 현주가 지닌 장점을 깎아내리고 비틀어 모멸감을 주는 것일지 그때의 미리는 알지 못했다.
미리는 애초에 그 남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주와 만나고 있으면 쉴 새 없이 현주에게 전화를 해서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도 싫었고 미리 앞에서 농담조로 현주를 깎아내리듯이 말할 때는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농담인 것처럼, 가벼운 이야기인 것처럼 현주의 그림을 보며 말한다고 했다. 이런 그림을 너만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 정도 수준의 작품들이야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당장에 팔리기야 하겠지. 근데 그 이상이 있어?
현주가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전업 작가가 되었을 때 그는 미소 지으며 자주 이렇게 말했다. 현주 너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
현주는 그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미리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는 현주에게 의부증 기질이 있다고, 현주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을 통제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리는 왜 그가 현주에 대한 거짓 소문을 지어 퍼뜨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주 너는 복잡하고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고, 넌 그저 그런 여자라고, 아니, 그저 그런 여자여야 한다고.
현주의 모든 역사를 지우고, 개성을 지우고, 그녀만의 특별함을 지우려는 말. 그는 ‘남자 하나에 목매는 여자’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현주의 특별함을 가리려 한 것이었다. 그가 퍼트린 가십으로 덧칠된 현주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인간도, 작가도 아니었다.

작업실 문을 열자 물감 냄새가 훅 끼쳤다. 큰 창으로 빛이 쏟아져 내려왔고 벽과 천장이 모두 흰색이어서 환한 느낌이 났다. 한쪽 구석에 설치된 실크 스크린 기계 옆으로 맥북이 놓인 널찍한 책상이, 그 옆으로는 프린터기가 있었다. 캔버스 여러 개가 뒤집혀서 벽에 기대어 있었고 작업실 중앙의 이젤에는 지금 작업 중인 캔버스가 올라가 있었다. 바탕색을 바르고 스케치만 한 상태여서 어떤 그림인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다 그린 것들도 와서 봐봐.”
현주가 벽에 세워놓은 캔버스들을 하나하나 뒤집어서 그림을 보여줬다. 어린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연작이었다. 두세 살짜리 아이들부터 열 살 무렵의 아이들까지 그림에 나왔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 다른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현주는 맞은편 벽으로 가서 가장 큰 그림 한 점을 뒤집어 보여줬다. 대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그림이었다. 아이의 배경이 빛으로 가득했다.
현주는 그림 옆에서 긴장한 듯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미리를 바라보았다. 미리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리는 크레파스의 냄새가 좋았다. 힘을 줘서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를 그을 때의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연필의 흑연과 나무 냄새가 좋았고 수채화 물감을 팔레트에 단정하게 짤 때의 기분이 좋았다. 팔레트 위에서 붓을 움직이며 색을 섞을 때, 연필로 스케치할 때의 만족감이 좋았다. 미술학원의 고요함이 좋았고 외부의 일을 잊고 온전히 그림에만 집중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 작고 안전한 대피소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그 사실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능력을 의식할 때의 기분이 좋았다.
미리는 불조심 포스터, 나무 심기 포스터, 6.25 기념 포스터 그리기 대회와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 소방차 그리기 대회에서 언제나 일등을 했고 구령대에 올라가서 교장 선생님께 상장을 받았다. 미리 너는 어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니? 다정하게 칭찬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미리가 그린 그림 좀 봐봐, 라며 감탄하는 같은 반 애들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게 어떤 칭찬이든 미리는 잊지 않고 마음속에 저장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늘 주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태어난 거야. 나는 그림을 그릴 거야. 더 잘 그릴 거고 화가가 될 거야. 아주 유명한 화가가 된다면 모두 나를 자랑스러워할 거고 내게 관심과 사랑을 주겠지.
적어도 그림에 있어서는 부모님도 미리를 인정해 주는 것만 같았다. 전국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을 때 미리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만큼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미리는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미술학원에서 현주를 처음 만났다. 학교는 달랐지만 같은 학원 승합차를 타고 다니면서 서로 얼굴을 익혔고 빠르게 친해졌다. 둘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진학했다. 열여덟에 만나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부부라고 불릴 정도로 붙어 지냈다.

미리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주의 시선을 통과한 어린 자신의 모습을 미리는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 그림이 미리에게 현주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현주의 그림에서 미리는 언제나 현주라는 사람이 보였다. 현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 그런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미리는 빈 캔버스 앞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미리는 그 초조함과 막막함을 극복할 수 없었다.
대학교 이 학년이 끝나갈 무렵, 미리는 그림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기말 작품 준비를 하던 날 중 하루였다. 한참을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고 고가도로에 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라디에이터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복도에서 웃으면서 신발을 끌고 걸어가는 남자애들의 소리가 들렸다. 미리는 그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더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었고 억지로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자기 가슴을 단단하게 죄어오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미리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학교를 졸업해야 했으므로 그렸고,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심심할 때 드로잉북에 크로키를 하기도 했다. 승무원이 되고 난 다음에도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미리는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일을 소중하게 남겨둘 수 있었다.
그 시작에는 처음 미술학원에 보내진 다섯 살짜리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미술이 외롭고 불안한 어린 시절의 인정 투쟁과 존재 증명의 도구였다고 오래 생각했지만 그 그림을 보며 미리는 기억해 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일은 미리의 방식으로 세상과 재미있게 어울리는 일이었다는 걸. 어른들과 다르게 그림은 미리를 반겨주고 안아줬다. 그림을 그릴 때 미리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일이 미리를 살게 했다. 그 사실을 오래 잊고 있었다고, 현주의 그림 앞에 서서 그녀는 생각했다.

3.

삼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미리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미리가 스카이프로 그 사실을 전하자 현주는 미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것은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현주는 어머니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고작 일 년에 한 번 방문했던 것도 잔인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야. 받은 건 생각하지 않고 나쁜 기억만 골라서 어머니를 판단하는 거, 어른스럽지 않은 일이야. 냉정하게 말하는 현주를 보면서 미리는 현주를 공격하고 싶어졌고 현주의 남자친구에 대해, 현주의 자신감 없는 작업 태도에 대해 빈정거렸다. 미리가 그렇듯이 현주 역시 누구보다도 미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 번질 수도 있었지만 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화 창을 나가버렸다.
그래, 가버려. 그냥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려. 그때 미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현주와의 애착 관계에 진절머리가 났고 그것이 현주라고 할지라도 타인이 자신을 아무렇게나 건드리는 걸 참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같이 사는 동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상처를 줬고 비행을 가서도 호텔에만 처박혀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마음의 깊은 곳까지 흔들렸다. 이 년을 만나던 애인과도 헤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상한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미리는 많은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동료들은 그녀가 일 중독자에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건 일견 사실이었다. 일이 좋기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공허함을 느꼈고 불안해졌으니까. 하지만 현주와 그렇게 싸운 이후에는 일에 몰입할 수가 없었고 자주 악몽을 꿨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누가 차가운 칼을 꽂은 것처럼 머리와 눈이 자주 아팠다. 실컷 도망쳤는데 그 끝에 다다라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오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가 태어나던 해부터 투병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말했제. 저 계집아가 재수가 없다꼬. 와 낳아서 이 사달이고.
미리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힘든 처지를 이야기할 때 늘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내가 미리를 낳고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애 백일에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고 가세가 기울었다. 그게 정말 딱 미리를 낳고부터다.
미리는 어릴 때는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방문을 닫고 생활했다. 학교가 끝나고는 바로 미술학원에 가서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끌다 집으로 들어왔다. 성인이 되고,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머니의 삶을 판단하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다. 어머니가 열세 살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하면서 얼마나 끔찍한 대우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미리는 들어 알고 있었다. 딸만 일곱에 막내 삼촌 하나만 아들인 집에서 다섯째로 태어난 어머니가 그저 사고파는 소나 말처럼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파 울었던 적도 있었다.
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그건 마법의 문장이었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마음속에 서러움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너처럼 유복한 생활을 하는 애는 절대 알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미리가 밥을 먹을 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잠에서 깨어날 때 미리를 골똘히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빛이 있었다. 어쩌면 다정하게까지 들릴 수 있는 말투로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 같은 애를 좋아하겠어.

미리는 운전하는 현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현주는 운전할 때 잠자리 모양의 갈색 선글라스를 썼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리는 현주가 운전해서 자신을 어머니가 있는 요양원까지 데려다주던 때가 떠올랐다. 일 년에 한 번씩, 현주는 서울에서 차로 왕복 여섯 시간 거리의 요양원에 미리를 태우고 다녔었다.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중기 환자로 요양원으로 보내진 미리의 어머니가 자신의 기억에 짓눌렸던 시절에는 얻지 못했던 평화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미리의 방문이었다. 미리가 어머니가 있는 사 인용 병실에 찾아가면 어머니는 치를 떨면서 미리에게 온갖 끔찍한 종류의 말들을 했다. 처음 요양원에 찾아온 미리를 보고 어머니는 저주 섞인 말을 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프지 않았을 때의 어머니는 미리에 대한 적의를 세련되게 가공하여 보여줬다. 집요한 괴롭힘이었지만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미리에게 다정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잃어버리고, 의식을 놓아버리자 어머니는 더는 그 감정을 미리에게 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미리에 대한 어머니의 염오는 그토록 순수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미리의 눈에는 차라리 자유로워 보였다.
미리가 얼굴을 보이면 어머니는 예외 없이 폭언을 시작했고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그렇게 미리는 잠시 어머니를 보고 휴게실에 앉아서 시간을 끌다가 현주에게 돌아갔다. 미리는 현주에게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둘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거실 소파에 앉아서 캔맥주를 마셨다. 텔레비전에서는 가벼운 분위기의 토크쇼가 나오고 있었는데 현주는 웃긴 이야기가 나와도 차분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현주는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는 잘 웃지 않다가 엉뚱한 지점에서 웃곤 했고 미리는 그런 현주의 모습이 좋았다. 반년 전만 해도 너무 밉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했던 현주가 바로 자기 옆에서 예전처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이 순간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흘을 함께 있었지만 못 보고 지낸 삼 년의 시간은 엄연했다.
미리가 소파 침대에 눕자 현주가 요를 들고 와서 소파 아래 바닥에 누웠다. 그러더니 자기 티셔츠에 안경알을 닦았다.
“안경은 언제부터 쓴 거야?”
미리가 물었다.
“한 일 년 전쯤부터?”
“시력 좋은 편이었잖아.”
“모르겠어. 지금은 안경 안 쓰면 잘 안 보여. 자꾸 울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고 현주가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는 듯이 안경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쿠션을 벴다.
“요즘도 많이 울어?”
현주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더니 눈을 뜨고 미리를 바라봤다. 벽걸이형 에어컨이 덜컥거리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주가 조금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현주가 미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직도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말에 미리는 먹먹해졌다. 이 년 반 만에 스카이프로 통화를 했을 때 둘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눴지만 삼 년 전의 다툼에 대해서는 조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상처가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때 그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냥 널 상처 주고 싶어서 못되게 굴었던 거야.”
미리가 말했다.
“알아.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 견디기가 힘들 때.”
“그래.”
“난 네가 힘들 때 늘 너를 더 힘들게 했었던 것 같아.”
현주가 미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리는 마음속으로 현주의 말에 동의했다.
대학교 이 학년 때, 미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현주에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현주에게 마음이 열려서 그랬다.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을 싫어하겠니.
현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리는 말문이 막혀서 웃으면서 자기가 애초에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듯이 자기 말을 수습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주가 말을 이었다.
네가 어머니 진심을 어떻게 알겠어.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 수는 있지. 그래도 미리야,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어.
그래.
미리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현주처럼 말했고 그 말의 합창은 미리를 예민한 사람이 되게 했다. 미리는 어머니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그 당연한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주인의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개처럼 노력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라도 찾으면 그 자그마한 것을 잡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라도 그런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서 그녀는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에 민감한 어른이 됐다.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현주와 함께 있을 때면 미리는 안전함을 느꼈다. 현주는 미리에게 미리의 존재 이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현주가 미리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니까. 무엇보다도 현주는 미리가 조건 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에 미리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불쾌함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현주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미리는 벽에 부딪힌 기분을 느꼈다. 왜 자신의 마음을 현주가 정확히 알아주기를 바랐던 걸까. 왜 그토록 현주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미리는 한 번씩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고 현주는 그런 미리의 이야기를 어린애의 투정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리는 어느 순간 현주로부터 자신의 한 부분을 이해받는 것을 포기했다. 최악의 인정 욕구는 자기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자신이 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갈 수 없는지 현주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건 심한 기대였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미리는 현주에게 기대했고, 타인에게 기대하고 다시 상처받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현주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에게 벌을 주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의식적으로는 현주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었으면서. 현주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주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곁에서 잠든 현주를 바라보면서 미리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4.

현주는 늦게까지 잠을 잤다. 미리는 소파에 누워서 조금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 세탁 세제를 섞고 스펀지와 유리창 밀대를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미리는 한쪽에 접어놓은 낚시 의자를 꺼내서 펴고 그 위에 올라가서 창문을 스펀지로 닦기 시작했다. 양동이에 스펀지를 넣으니 양동이 물이 온통 잿빛이 됐다. 유리창 밀대로 물기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고 작업실 바깥 창문도 그렇게 닦았다. 깨끗해진 창으로 미리는 바깥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르바이트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답을 줘야 하는 시간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당장에 그다음 날부터 광주에 가야 했다.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현주의 집에서 미리는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잤다. 두바이에서도 한동안 대기를 하며 일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했었고 한국에 들어와 격리를 하는 동안에는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쉴 틈이 없었다. 마음에 파도가 한 번 들이치면 수면에 떠다니던 쓰레기들이 그대로 해변으로 밀려왔고 미리에게는 그 쓰레기들을 수습할 힘이 없었다.
현주는 미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광주로 내려갈 것인지, 여기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인지, 실직하게 되면 어떤 계획이 있는지…… 지나가는 말로라도 걱정된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때 미리는 현주가 너무 이른 나이에 은퇴한 노인처럼 산다고 판단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더 넓은 곳으로 나가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그건 일종의 퇴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주와 시간을 보내면서 미리는 그런 판단이 자기 오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주는 천천히 자기 속도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현주와 같이 밥을 먹을 때, 자기 전에 누워서 이야기할 때, 현주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바라볼 때 미리는 자신이 현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도 현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주는 미리에게 처음 작업실을 보여준 뒤부터 계속 작업실 문을 열어놓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에서 현주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명랑한 목소리의 디제이가 진행하는 오후 프로그램이었다. 디제이가 청취자의 전화를 받아서 스피드 퀴즈를 진행하고 있었다. 현주는 고등학교 때부터도 라디오를 켜놓고 작업을 했다. 라디오 소리도 빛에서 온 거 알아? 소리를 빛으로 바꾸고 그 빛을 다시 소리로 바꾸는 거래. 그런 말을 하며 눈을 빛내던 어린 현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주는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만 들었다. 비록 같은 공간은 아니더라도 같은 시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좋아서 생방송만 듣는다는 현주의 말을 미리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메모장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현주가 작업을 마치고 미리를 불렀다.
“가까이 와서 볼래?”
현주가 미리를 보며 손짓했다.
그림은 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들 일곱 명이 모래사장에서 열중해서 노는 모습이었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미리는 그 그림에 더 몰입하게 됐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현주가 포착한 그 순간 속에서 시간과 무관하게 살고 있었다.
미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모래 장난을 하다 보면 금세 해가 저물고 바람이 쌀쌀해졌다. 해가 지는 걸 외면하면 시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몰두해서 놀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같이 놀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금 모든 것이 분리된 세상 속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 들어서 두려워졌다. 미리는 기억했다. 그 시간은 아주 길면서도 동시에 순간에 불과했다.
“드로잉북 가지고 왔어?”
현주가 그림을 보는 미리에게 물었다. 미리는 드로잉북을 들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미리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현주에게 그 그림들을 보여주는 건 현주와 미리의 연례행사였다.
“깜빡해서 놓고 왔어.”
“하나 줄까?”
“응. 그럴래?”
드로잉북을 가지러 가는 현주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리는 현주가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않았기를 바랐다.
어머니를 보러 마지막으로 요양원에 갔던 날, 미리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그린 그림 세 장을 가져갔다. 어머니는 미리의 그림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미리는 그것이 어머니가 자신을 인정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어머니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미리는 요양 보호사에게 그림을 건네고 병실 앞 복도에서 어머니가 자기 그림을 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그 그림을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찢어 구겨버리고 바닥에 던져서 발로 밟았다. 자신의 모습을 찢고 구기고 발로 밟는 어머니. 그것이 미리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미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건 어머니의 자유의지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삶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리는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때로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선택할 수 없었다. 이런 삶이 자신의 것이었을까. 미리는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미리는 자기 의지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현주는 새 드로잉북과 함께 연필과 지우개를 미리에게 건넸다. 미리는 드로잉북을 만지작거리면서 그걸 만지고 있는 자기 손을 오래 쳐다봤다.
현주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현주는 커다란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와 팔뚝에 모기에 물려 부은 자국이 여럿이었다. 그런 현주의 모습 위로 회색 백팩을 등에 딱 맞게 메고 씩씩한 걸음걸이로 걷던 어린 현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말수는 적었지만 현주가 쓴 편지와 쪽지는 늘 미리의 마음을 두드렸었다. 현주는 미리에게 밀려들었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사실상 부당할 정도로 과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리는 현주가 어렵기도 했다. 미리에게 관계란 매 순간 상대의 시선으로 자신을 심판하며 최대한 자기 자신의 황폐함을 철저하게 감춰야 하는 노동이었으니까.
현주의 사랑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했을까.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 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일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오면서 누적되어온 피로였다. 진짜를 가질 자신이 없어서 늘 잃어도 상처 되지 않을 관계를 고르곤 했다. 어차피 실망하게 될 거, 진짜가 아닌 사람에게 실망하고 싶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조각난 자기 자신을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현주는 미리가 유일하게 위험을 감수하고 만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더 내게 와줘. 그 갈망은 너무나 내적인 것이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렌지빛 햇빛이 마당 가운데로 기다랗게 내려왔다. 현주가 안경을 고쳐 쓰고 골똘히 창밖을 바라봤고 미리는 그런 현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현주네 집에서 창을 열어놓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둘이서 넋 놓고 구경하던 여름날이 떠올랐다. 같이 누워서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으며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 카레를 한솥 끓여놓고 며칠을 계속 카레만 먹었던 기억, 보일러에 이상이 생겨서 추웠던 밤에 일어나 보니 현주가 자신에게 털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준 걸 알게 된 기억, 늦게 일어나 보면 현주가 밥을 새로 짓고 국 한 냄비를 끓여놓고 갔던 기억…… 그 시절이 미리에게는 또 다른 유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일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 시절 또한 되풀이될 수 없다고 미리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현주를 만나고 현주의 집에 와서 시간을 보내겠지만 현주의 집은 현주의 말처럼 자신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될 수는 없었다. 현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미리는 생각했다.
“미리야.”
현주가 거실 창을 가리키며 미리를 불렀다. 갈색 산새가 감나무 위에서 날아 현주의 마당에 착지했다. 현주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탄하며 말했다.
“쟤 좀 봐봐, 미리야.”
다음 날 아침 미리는 마당으로 가서 낚시 의자를 펴놓고 앉아 드로잉북을 펼쳤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와 산새 소리,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햇볕이 뜨겁고 공기가 습해서 땀이 났다. 미리는 손등으로 이마에 돋은 땀을 닦으면서 현주가 준 연필로 눈앞의 감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감나무를 다 그리고 나서는 감나무 옆에 서 있는 현주를 그렸다. 미리의 그림 속에서 현주는 한 손으로 감나무를 만지면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 봐, 현주야. 사진 찍을 때 그렇게 부탁하면 쑥스럽게, 그렇지만 한순간 환하게 웃는 현주 특유의 웃음이 있었다. 그 표정을, 미리는 현주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었다.
최은영
최은영
소설가, 1984년생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