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 산책
그림 속에 펼쳐진 창덕궁과 창경궁의 장대한 경관

-<동궐도>

  • 우리 그림 산책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그림 속에 펼쳐진 창덕궁과 창경궁의 장대한 경관

-<동궐도>

그림1.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동궐도(東闕圖)>는 현재 국보 제249호로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그림 1, 2). <동궐도>는 경복궁(景福宮)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그린 작품이다. 1392년에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2년 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한양에 지을 도성과 궁궐을 총 설계하였다.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139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395년 9월에 완공되었다. 법궁은 정궁(正宮)을 의미한다.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해 북궐(北闕)로 불렸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이후 등극한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은 한양을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還都)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한양으로 다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이궁은 별궁(別宮)을 의미한다. 창덕궁은 1404년 10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년 뒤인 1405년 10월에 완공되었다. 태종은 1405년 11월에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창경궁은 본래 1418년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상왕(上王)인 태종의 거처지로 지은 궁궐이다. 건립 당시 창경궁의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1483년에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의 계비(繼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를 모시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강궁의 궁역(宮域)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1484년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수강궁은 창경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가 소실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에 중건되어 경복궁이 중건된 1867년까지 법궁으로 이용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1620년에 지은 경덕궁(慶德宮), 즉 경희궁(慶熙宮)은 서궐(西闕)로 불렸다.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대신해 동궐과 서궐의 양궐(兩闕) 체제로 궁궐이 운영되었다.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자리 잡은 경복궁은 『주례(周禮)』의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다. 경복궁은 남북을 축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의 구조 속에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다. 반면 응봉(鷹峯) 밑에 위치한 창덕궁은 산, 구릉, 평지가 섞인 지형에 따라 지어져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이다. 엄격한 질서와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이었던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치는 궁궐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는 거대한 궁궐이 자연을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화면의 왼쪽이 창덕궁이고 오른쪽이 창경궁이다. 이 그림은 대략 1828년 1월 이후~ 1830년 8월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16개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3). 각 화첩은 마치 아코디언(accordion)과 같이 접어서 포갠 절첩(折帖) 형식을 보여준다. 각 화첩은 위에서 아래로 5번 접어 6면으로 되어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현재 병풍으로 표구되어 있는데 본래는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마찬가지로 화첩이었다. <동궐도>는 천(天), 지(地), 인(人) 세 본(本)이 만들어졌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는 인(人)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천 또는 지에 해당된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수많은 전각(殿閣)과 정원, 연못 및 궁궐 주변의 산과 언덕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그림 4). 평행사선(平行斜線) 구도와 부감법(俯瞰法)이 적용된 <동궐도>는 웅장한 화면에 각각의 건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우물, 장독대 심지어는 해시계, 측우기 등 궁궐 내에 설치된 천문 관측기구까지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동궐도>는 장대한 스케일뿐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경관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아시아 궁궐도(宮闕圖)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림2.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274.0x578.2cm, 동아대학교박물관     

 

그런데 <동궐도>는 그림 형식부터 특이하다. 동궐도는 본래 16개의 절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림 전체를 보려면 화첩을 하나하나 펼쳐야 한다. 이 그림은 왜 이런 형식으로 그려진 것일까? <동궐도>의 가장 이상적인 형식은 병풍이다. 이 그림이 병풍으로 그려졌다면 한눈에 그림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상하로 접어 포개진 16개의 절첩을 모두 펴서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회화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왜 이와 같이 절첩이라는 매우 불편한 형식으로 <동궐도>가 그려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16개의 화첩은 어느 곳에 펼쳐졌을까? 거의 길이 6미터, 높이 3미터에 가까운 <동궐도>는 벽에 펼쳐졌을까 아니면 전각의 바닥에 펼쳐졌을까? 절첩 형식은 흔히 대형 지도인 전도(全圖)에 사용되었다.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22개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화첩은 접는 형식인 절첩으로 되어 있다. <동궐도>는 궁궐 그림인 동시에 상세하게 궁궐 내의 각종 건물과 시설물, 궁궐 주변의 경관이 표현된 회화식 지도이다. 조선시대에 지도는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기밀(機密) 문서와 같이 취급되었다. 따라서 궁궐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린 <동궐도>는 최고의 기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 왕실의 일급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 내부를 그린 <동궐도>는 절대로 밖으로 유출돼서는 안 되는 극비(極秘) 그림이었다. 따라서 지도와 같은 절첩 형식으로 이 그림이 제작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림3. <동궐도>, 국보 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 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4. <그림 1>의 세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일대  


<동궐도>는 절첩이라는 그림 형식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왜 그려졌는지 또한 현재 알 수 없다. 이 그림의 제작 동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선시대에 궁궐을 그린 궁궐도는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 즉 군주의 치도(治道)를 상징하는 정치적 그림이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 궁궐은 번성하지만 군주가 덕을 잃고 정사(政事)를 그르치면 궁궐은 쇠퇴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궁궐의 흥폐(興廢)는 곧 정치의 성패(成敗)와 직결된 것으로 여겨졌다. 16세기 중반에 병풍으로 그려진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의 제발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한양궁궐도>는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궐도>는 <한양궁궐도>와 같은 정치적 성격의 그림이었을까? <한양궁궐도>는 병풍으로 제작되어 옥좌(玉座) 서쪽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동궐도>는 절첩으로 되어 있어 화첩 하나하나를 다 펼쳐야 궁궐의 전체 모습이 나타난다. 따라서 <동궐도>는 왕과 신하가 함께 보며 궁궐과 정치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그림이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불이 자주 났으며 그 결과 전각들이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지어졌다. <동궐도>에는 각각의 전각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동궐도>는 궁궐의 전각들이 화재로 사라지게 되었을 때 다시 이 건물들을 재건(再建)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시각적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궐도>는 궁궐의 전각들이 화재로 타고 이후 재건될 때 참고하기 위해 그린 그림일까? 현재 전하지 않지만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때 제작된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라는 그림이 있었다. <동궐도>와 마찬가지로 <경복궁전도>는 중건된 경복궁에 있었던 모든 전각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그림이다. 고종은 경복궁 내 전각 일부를 개조하고 수리할 때 이 그림을 활용하였다. 따라서 <동궐도>도 화재로 타버린 전각을 재건하거나 일부 전각들을 개수(改修)할 때 가장 중요한 시각적 참고자료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궐도>와 같은 장대한 스케일의 그림이 그려졌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만약 건물들을 재건할 때 활용할 목적으로 <동궐도>를 그렸다면 현재와 같은 절첩식 그림으로 그려질 필요가 없다. 차라리 각각의 전각을 개별적으로 그린 그림이 이러한 목적에는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경복궁전도>가 병풍 그림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형식의 그림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경복궁전도> 하나가 당시 호조(戶曹)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동궐도> 세 본 중 두 본은 왕과 세자가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 한 본은 호조와 같은 관청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동궐도>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그림이 왜,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으며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결국 조선 국왕의 거주지이자 정무 공간인 금궁(禁宮)을 정교하게 그린 <동궐도>의 제작 의도 및 기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그러나 흥미로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림1.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2.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274.0x578.2cm, 동아대학교박물관
그림3. <동궐도>, 국보 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 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4. <그림 1>의 세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일대
장진성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