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공간
팔레트, 늪, 사랑 - 지구 반대편에서

  • 내 문학의 공간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팔레트, 늪, 사랑 - 지구 반대편에서

에펠탑을 보면 집에 온 기분이 든다.

어떤 기억은 어떤 기억으로 덮을 수 있다. 물감을 잘 개어 덧칠을 하듯이. 다만 모두 말리고 나서 칠해야 밑 색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검정을 하양으로 지울 수 있다. 나는 포옹의 힘을 믿고, 사랑을 말하고 싶고, 우리가 일어서는 탄력성을 믿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다. 아직은 상자 속에 가득한 ‘완벽’이라는 장난감을 버리지 못해 늘 어렵지만.
애써 그린 그림 위로 물통이 엎어져도. 금세 잊어버릴 수 있는 것. 너무나 원하는 물건을 사러 갔지만, 모두 팔렸을 때. 웃으며 돌아갈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이 멋지다. 파리에는 두 번 갔었다. 여행 일정 중에는 꼭 전시를 보러 간다. 두 번째 갔던 퐁피두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한 번 보았던 조형물과 그림을 다시 보았을 때, 반가우면서도 시시했다. 마티스와 고흐의 그림들이 좋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커다란 감동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 그땐 슬픔을 끌고 다녀서 비어있는 공터만 봐도 눈물 났을 테니까.
마레 지구에 가면 빈티지 숍을 꼭 들른다. 골목골목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아른거린다. 그때 구입한 짙은 초록 체크무늬 치마와 파란 재킷은 너무 근사한데. 왠지 한국에선 잘 안 입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컬러풀한 물건과 옷가지에 눈길이 간다. 마음이 흐려서 그런가. 봄이 오면 다시 개시해보고 싶다.

몽마르트 언덕으로 가는 길 ⓒparanpee 

 

어릴 적부터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과 새벽, 어둠과 무너지는 것들. 죽음에 가까운 그림자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지루하다. 좀 더 입체감 있고 살아있는 것들을 모으고 싶다. 기피하던 햇빛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늘 어떤 말을 하고서는 다시 뒤돌아본다. 어제 믿었던 사실이 오늘은 거짓이 되어있듯이.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영화 ‘겨울왕국’에 등장하는 눈사람, 올라프의 말처럼 사랑밖에 없을 거야. 무엇보다 가장 강한 힘. 우리를 이어줄 수 있는 힘. 악을 파괴할 힘.
마레는 불어로 ‘늪’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느 여름에 쓴 시 「라넌큘러스」도 습지에서 자란다. 가만히 있어도 발이 푹푹 빠지는 우울 속에서. 나를 벼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 속에서. 매일 마음을 붙들고 버텼다. 발끝에 힘을 주면서. 나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환하게 반짝이던 어제들이 아주 머나먼 옛일 같다. 나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던 시절.
오늘은 잘 지냈잖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도 챙겨 먹고, 일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하고 말이야. 다만 겉으로 행하는 것들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빠져나오려 애쓸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처럼. 힘을 풀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자.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일 테지만. 그저 사랑하는 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나는 혼자가 아니다.
행복에 젖어있을 때, 시는 넓은 들판에서, 벤치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지켜본다. 말 한마디도 걸지 않고 비둘기들에게 빵 조각을 던지지도 않고 햇빛을 햇빛이라 읽는다. 인간은 변한다. 하지만 저절로 변하지는 않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참아보거나. 문 앞을 한참 서성이다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거나. 세상의 뾰족한 부분들을 들여다보거나. 무섭다며 회피하던 것들을 마주할 때. 나를 이루는 속성에 대해 질문할 때. 인간은 변한다. 나는 흘러간 어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겠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놓인 그림 한 점을 마주할 때.
모든 것이 천천히 밝아진다.
강혜빈
강혜빈
시인, 사진가, 1993년생
시집 『밤의 팔레트』, 공저서 『2016 문예지 시인상 당선 시집』 『어느 푸른 저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