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미신(未神)

  • 나의 아버지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미신(未神)

#1. 공장에서 태어난 시

 

이 사진은 제가 등단하던 해에 찍은 아버지 사진입니다. “인간 못 된 것들이 시를 쓰는 거지”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셨으니까 인간이 덜된 분이실지 모릅니다. 어쩌면 인간과 금수, 인간과 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등단 직후에 인도와 네팔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양과 돼지와 함께 버스를 탔고 안나푸르나 기슭 마을에서 정말로 큰 오이를 이고 맨발로 걸어가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큰 오이’를 메타포로 쓴 건 아닙니다만, 한 평론가는 “무의식에 잠재된 성기의 메타포”라고 쓰셨던데, 괜찮아요.
나의 아버지의 첫 직장은 금성사 총무과였습니다. 거기 그대로 계셨다면 현재 엘지그룹의 임원이 되셨을까요? 아버지는 직장에서 나와 가내공장을 차리셨는데, 그 일이 번창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진주 대평에서 먼 친척들이 공장으로 와서 일했습니다. 어떤 이는 졸면서 야근하다가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기도 했고 어떤 이는 식모 일을 하다가 임신도 했지요.
공장에는 마당이 있었고 잔디밭이 있었고 개미가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그네가 있었습니다. 그 공간 외엔 색색의 슬리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로 가득했지요. 저는 그네를 타며 저만치 가건물에서 들려오는 기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고 해요. 스르르 몸이 미끄러져 잔디밭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고 하는데, 선천적인 낙천성을 타고난 순한 아이였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시곤 했죠. 밥만 먹여놓으면 울지도 않는다고.
당시 아버지 친구 중엔 책 외판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저씨의 부실한 판매실적 덕분에 작은방 한가득 책이 넘쳤고 저는 엘리스처럼 토끼를 따라 굴로 뛰어들거나 소년들과 바다를 표류했지요. 밤마다 벽에서 검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던 건 부작용, 아버지의 공장 옆에는 시멘트 블록을 제조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수선화와 빨간 장미로 뒤덮인 작은 담장 위로 파랑새가 날아가는 걸 볼 수도 있었습니다. 제 눈엔 보였죠. 책은 저의 도피처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은 어른이 아니었네요. 부모님이 서로를 죽일 듯이 하고 헤어질 때는 무슨 판단력이 있었겠나 싶습니다. 서른 갓 넘긴 어머니와 새어머니의 청춘을 상상해봅니다. 상상력이 없다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부모님의 상황과 심정을 지금은 이해합니다.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건방진 말이려나. 고독과 슬픔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리라는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렜습니다.

수세미보다 굵고 수박보다 큰 오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서로 혐오하는 사이에 시들었습니다
차장은 나를 지붕에 태우고 출발 호루라기를 불었습니다
물소떼가 길을 가로지르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의 느린 행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카마수트라를 읽습니다

날 안고 재워주던 기계의 맥박 소리는 달콤했습니다
초콜릿 공장은 아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원료 포대에 기어들어가
달짝지근한 책을 읽다 잠들면 옥상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마터면 야근의 프레스에 뒤터진 슬리퍼가 되었겠지요

내가 올라탄 버스 기사는 아예 엔진을 꺼버렸습니다
검은 소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머리 위에 재 같은 까마귀가 날아갑니다
입사한 언니들은 배가 불러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순진한 적 없는 나는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공장장 아저씨가 나를 발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두고

외출증을 끊어갑니다 치마에 피가 묻었습니다
플라스틱은 녹아 흐르고 쇳덩이들이 뜨거워졌습니다
처음으로 공장집이 따뜻해지자 사라졌습니다
착한 새엄마가 불을 냈을 리 없습니다

갑자기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내 목소리가 들립니다
다녀왔어요,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작업장, 그을린
기계들에게 인사합니다
옥상에 올라가 고양이만한 쥐들이 들락거리는 구멍을 봅니다
읽지 말라던 책을 숨겨놓았던 자립니다

이 쥐새끼는 어디 가서 뭘 처먹고 구멍보다 크게
어른보다 잽싸게 자랐을까요

- 「청춘이라는 폐허 2」, 『별 모양의 얼룩』 (천년의시작, 2005)


#2. 나만 몰랐던 비밀

숲으로 엠티 왔네 이름도 거시기한 반성수목원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과 함께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퍼지는 햇살 아래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고 마시네 먹을 게 넘쳐나네 신비한 숲속의 향연이 따로 없네 저만치서 걸어오는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한 그가 히죽히죽 어슬렁거리던 그가 내게 다가오네 먹다 남은 음식 좀 달라고 하네 연신 손바닥을 비비네

흠뻑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왔네 혼자서 칠갑하고 있겠지

먹던 도시락을 건네네 방울토마토 굴러가네 마시려던 맥주병도 던져 주었지 내 곁에 쭈그려 앉은 그가 추잡한 옷차림의 그가 여기저기 버려둔 떡이며 찌꺼기 같은 걸 갈퀴 같은 손으로 끌어와 입으로 주머니로 쑤셔 넣는 그가 게걸스럽고 무례하고 추레한 또 뭐라고 할까 그래 인간도 아니다 수치심을 이긴 죽음을 극복하는 허기 불멸하는 궁기 그리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신이다 신이 오셨다

걸신도 되지 못한 아버지를 두고 왔다 자꾸 미끄러지는 턱받이를 하고 음식을 토하는 어린애를 혼자 두고 왔다 반성수목원으로 동료들과 섞이려고 반성은커녕 식물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어이, 알거지병신새끼라고 부르고 싶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아버지가 고이 기저귀에 똥 싸면 될 것을 엉덩이로 비비고 뭉개 온몸에 처바르면 내가 곁에서 오래 닦고 치워야 하니까 어디 도망 못 가라고 날 미치게 하려고 바꾸려고 수련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텐데

동료들이 또 웃네 내게 손가락질하네 넌 왜 만날 따로 있어? 그렇게 잘났어? 거기가 좋아? 둘이 제법 잘 어울려

동료든 아버지든 내 가슴 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구역질나는 미신 엉덩이 털고 일어나 나는 풀밭으로 뛰어간다 푸닥거리하듯 떡과 밥 사이로 쓰레기 오물과 웃으며 뒤집어지는 사람들과 배불러 죽겠는 사람들과 걸신과 환자 사이로 펄쩍펄쩍 넘어 다닌다 얼추 미친년처럼

- 「너라는 미신」, 『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무한히 쓸 것 같았는데, 이 글은 마치 고문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다는 말도 어불성설입니다. 저는 그럴 자격도 없어요. 가지 않겠다며 울며 떼쓰는 어린 저를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데리고 다니신 아버지로 인해 이 정도의 체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 모시고 아무 데도 가지 못했습니다. ‘반성수목원’은커녕 집 근처 식당에나 겨우 갔죠. 아버지는 암 수술을 세 번 받으셨고 혼자 앉거나 걸을 수도 없으십니다. 의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으니 댁에서 드시고 싶은 거 드시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변 주머니 차고 저녁 드시다가 말씀하십니다. “재산도 명예도 건강도 잃고 다 말라붙었는데, 눈물은 마르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니?”
김이듬
김이듬
시인,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 『모든 국적의 친구』 『디어 슬로베니아』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