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저항은 살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것

- 존 버거와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저항은 살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것

- 존 버거와의 대화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 영국의 미술비평가이자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주요 저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 『제7의 인간』 『행운아』 『벤투의 스케치북』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G』,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끈질긴 땅』 『그들의 노동에-한때 유로파에서』 『그들의 노동에-라일락과 깃발』, 『킹』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A가 X에게』 등이 있다.


정혜윤(이하 혜윤) : 존.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몇 날 며칠 얼마나 긴장되고 설렜는지 몰라요. 존!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제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하고 싶어요. 어쩌다 보니 저도 몇 권의 책을 쓰게 되었어요. 글은 쓰는 것은 저에겐 일종의 천국 같은 경험이에요. 가장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쓰니까요. 그러나 쓰고 나면 의심과 후회가 밀려와요. 그런데 왜 내가 책을 쓰고 있지? 내가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정당화할 수가 없어요. 그때는 항상 당신이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한 말을 기준으로 삼아요. 당신은 우리 같은 인간이 드로잉을 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동행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저는 커피를 입에 한 모금 물거나 아니면 회사 앞 공원의 나뭇잎을 한 장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질문을 던져봐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동행한 거야?’ 마치 나뭇잎 안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나뭇잎 안에 있는 것은 에너지겠지요? 우리에게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명의 에너지요. 그 생명력이 제 대답을 듣길 원해요. 제 스스로 그렇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면 그때는 제가 책을 써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겨우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돼요. 그러니까 당신은 저의 ‘기준’이라는 뜻이에요. 어쩌면 저에게는 이제 글을 쓰는 데 단 하나의 기준만 남아있는지 몰라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동행했는가?’ 이것은 당신이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가지지 못했을 삶의 기준이라고 느껴져요. 당신 덕분에 저는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고 살기를 원할 수 있었어요. 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지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거짓말을 못하는 것처럼요.
감사의 마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 글을 읽으면 이상하리만큼 거리감을 느끼지 못해요. 늘 붙어있는 사람들하고도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있기 마련이고 그때 저희는 추워지지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따뜻함을 느껴요. 이런 따뜻함은 당신이 열려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저에게는 ‘축복’이에요. 당신은 축복은 우리가 서로 가깝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저는 당신 글에 뺨을 대고 따뜻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저의 외로운 순간에 함께 있을 생각들을 저에게 선물했고 본보기가 되었어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미리 살면서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삶, 되고 싶은 모습에 영감을 줬어요. 당신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더 새로워졌어요. 그래서 당신의 부고를 들었을 때 저는 허둥댔어요. 당신의 새로운 글을 읽을 수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을 큰 상실로 느꼈어요.
그러나 다시 당신 책들을 꺼내 읽으면서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어요. 당신은 분명히 있었고 언제나 있을 거예요. 지금 이렇게 제 앞에 모습을 보인 것처럼요. 존. 저승에서 지내기는 어떠세요? 여기 지상에 인터뷰를 하러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존 버거(이하 존) : 혜윤. 당신이 말한 축복은 내 인생 후반기에 나를 사로잡았던 주제 랑데부이기도 해요. 재회, 만남. 이 말은 내겐 합일을 말하는 거예요. 충만한 일치요. 나는 늘 그런 순간을 기다렸지요. 나는 저승에서도 계속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래요. 지상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그게 천국이니까요. 다른 일은 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만 사냥꾼 친구 중 한 명은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아요. 그 친구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죽여버린 동물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다 안아주고 있어요. 그러면 동물들은 그의 품에서 위안을 구하고 파닥거리며 뛰어가요. 나는 살아있을 때 죽은 사람에게 죽은 사람을 소개해 주곤 했어요. 내가 소개해 준 죽은 사람들은 이미 친구가 되어있었고 내가 그들 곁에 도착했을 때 모두 나를 환영해 줬어요. 나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막 도착한 새로운 사람이었어요. 내가 저승에 도착한 날 다 같이 스틱스 강가로 피리를 불면서 소풍을 갔어요. 강가에 버드나무가 많았어요. 당신 나라에도 많은 나무죠? 악단이 와서 연주도 했고 춤도 췄어요. 그날 나도 지상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춤을 췄어요. 내가 그린 그림들, 받은 편지들, 내가 쓴 글들, 내가 맛본 과일들, 본 그림들, 사랑했던 사람들 모두를 위한 춤이에요. 그때 어떤 노래의 후렴구가 생각났어요. ‘당신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그날 내가 얻은 것은 순수함이었어요. 내가 늘 음악에서 배웠던 것이 그것이지요. ‘순수함은 상처의 피를 멎게 해준다!’ 그 순수함이 도전을 가능하게 하죠. 나는 이제 내게 남은 도전은 무엇일까, 이제 무엇을 더 해볼까 생각했어요. 아마 우리 오래된 친구들이 하던 일을 나 역시 계속하게 되겠지요. 지상의 사람들과 연결되는 거요. 그들의 잠 없는 밤 친구가 되어서 함께 있는 거요. 이렇게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예요. 저승에서 우리는 가끔은 서로의 글과 그림을 보여주곤 해요. 우리는 성공과 보수랑 관계가 없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자유롭지요. 나의 많은 친구들은 그 자유를 지상에서도 누렸지만 그 자유 때문에 혹독하게 대가를 치르기도 했어요. 그러나 대부분 개의치 않았어요. 그건 스스로 택한 삶의 스타일이었어요. 나는 그걸 우리끼리의 공모라고 불렀어요. 우리는 서로의 삶의 가혹함을 견디게 하려고, 서로 알아보려고 함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승에서는 누구나 지상보다 더 빛이 나요. 사랑하고 꿈꿀 시간이 늘어서일까요? 유한성의 경계를 건넜기 때문일까요? 다른 시공간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다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도 지상에 있는 동안 가능하면 자신에게 딱 맞는 시공간으로 가 볼 수 있어야 해요.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가 아닌 다른 곳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우리가 늘 밝지는 않아요. 우리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여전히 몸 안에 어두움을 지니고 있어요. 하늘은 지상의 모든 일을 비추는 거울이랍니다. 하늘은 현재 미래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을 비추고 있어요. 지상에 있을 때 내가 글을 쓰게 만든 가장 큰 힘은 절박함이었어요. 내 친구들도 나와 절박함을 공유하고 있어요. 내가 지상으로 내려올 때 저승 친구들이 말을 잘 전하고 오라고 했어요. 영어, 폴란드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린란드어, 포르투갈어.
인디언의 말들. 고래의 말까지 지상의 온갖 언어들이 오랜만에 저승에 울려 퍼졌지요

 혜윤  모든 언어로 절박하게 전해달라는 말은 뭐였어요?

정혜윤

 존  당신이 내 책을 가까이했으므로 내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둔 단어들을 몇 가지 알고 있지요? 그 단어들에서 출발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혜윤  그럼요. 저에게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언제나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싶거든요. 당신은 본보기라는 단어를 자주 썼어요. 그리고 공모라는 단어, 빛과 어두움, 그리고 몸이란 단어도 많이 썼어요. 당신은 인간이 손과 눈으로 한 일이란 표현도 자주 썼어요. 이 말 또한 저에게 영감을 줬어요. 저도 저의 손과 눈으로 이루어낼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늘 찾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저항이란 말을 다른 말보다 훨씬 자주 했어요.

 존  맞아요. 그래요. 내 친구들이 나에게 신신당부한 단어가 ‘저항’이었어요. 혹시 에이드리언 리치라는 시인을 아세요?

 혜윤  어머나, 놀래라! 신기해요. 그렇지 않아도 에이드리언 리치의 안부를 묻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딱 그 이름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역시 만날 운명이었나 봐요. 이게 랑데부인 거죠?

 존  내가 여기 올 때 그녀가 나를 배웅해 줬어요. 그녀는 항상 문턱 너머의 세계에 관심이 있었어요. 문턱만 건너면 보이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문턱을 넘기를 바랐죠. ‘문턱 너머 저편!’ 그런데 왜 하필 당신은 그녀의 안부가 묻고 싶었어요?

 혜윤  그녀의 눈에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두려움, 혐오, 쇼핑이었어요. 그녀는 인간이 그렇게 힘을 얻는 것에 저항했어요. 그것 말고 인간이 다른 것으로 힘을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요. 우리 안의 더 좋은 인간성이 나오길 바랐어요. 저는 그녀의 말이 절박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길 원해요. 존, 저도 이 세상에서 사는 데 점점 더 암울한 두려움을 느껴요. 우리는 냉담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려움이나 혐오에 굴복하지는 않죠? 무엇인가가 인간을 지속적으로 굴복시키는 거죠? 존, 우리 인간은 대체 어떻게 힘을 내야 할까요?

 존  그래요. 우리는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힘을 내는 방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힘을 내는 방법은 저항뿐이에요. 에이드리언은 지상에서 시인으로서 언어의 가치가 추락하는 것에 저항했어요. 그것이 우리를 가깝게 했어요. 나 또한 언어의 오염에 분노했으니까요. 언어가 오염되면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기 어렵게 돼요.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모르게 되죠.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지금 일어나는 문제 중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데서 와요.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지금 전 세계에서 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우리는 어떤 말로 표현할까요? 아마존에서 원주민들과 야생동물들이 겪는 일에 대해서는요.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코로나로 혼자 집에 있다가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는요. 전 세계적인 투기자본에 휘청대는 사람들의 덧없는 마음을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뭐라고 부르나요? 경기 호황이라고 부르겠지요. 미국인인 그녀는 자신의 나라가 원주민 학살, 자연의 파괴에서 풍요를 이룬 것에 분노했어요. 그리고 여전히 같은 정신을 가지고 계속 풍요를 원하는 태도에 분노했어요. 그녀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만든 것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에 저항하라고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여전히 그것들과 함께 사는 것에, 부가 가치관이 중심이 되는 것에,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에, 인간의 삶과 고통이 수량화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라고 했어요. 코로나 시대에는 그녀의 말들이 더 각별하지요. 우리는 이 사태를 만든 우리 삶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혜윤  그녀의 다른 말들이 생각나네요. 타인을 향한 비뚤어진 경멸에 저항하라. 혐오와 자기혐오에 저항하라. 피상성에 저항하라. 외면에 저항하라. 움직이지 않는 것에 저항하라. 어느 세대든 소비자가 되어버리는 것에 저항하라…… 그녀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라는 표현을 썼어요. 지금이 그때군요.

 존  그래요. 에이드리언이 나를 저승 문턱까지 따라와서 한 말들이 바로 그거예요. 죽은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이 깨어나야 해요. 새로운 암흑시대에는 고통을 나누는 것이 품위와 핵심의 전제조건이에요. 사실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은 나눌 수 있어요. 이 나누려는 의지가 저항이에요. 지금처럼 심각하게 분리된 시대에는 연결이 절박하게 필요하고 우리가 받은 유산은 고통과 슬픔이에요. 우리는 고통과 슬픔으로 연결되어야 해요. 이 연결은 이제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과의 연결까지 확장되어야 해요. 연결이 강할수록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어요. 저항은 초절정의 소비자본주의 너머 뭔가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일이에요. 저항은 영혼과 상상력을 가진 생명체로 폐허 속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내고 길을 만들고, 계속 살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거예요.

 혜윤  어떻게 길을 만들어야 할까요?

 존  우리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의 삶을 사는 것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지도 몰라요.
우리가 망가뜨린 것들을 수선하면서 길을 내야 해요. 거기서 빛의 조각들을 찾으면서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요. 스스로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면서요. 인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으면서요. 불가능을 원하라!라는 말이 있어요. 살아있다는 희열에 가까운 느낌도 거기서 와요.

 혜윤  그래요. 당신은 스스로를 이야기꾼으로 생각했지요. 이야기꾼은 낯선 이야기들을 친숙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요.

 존  맞아요. 그랬지요. 이야기의 빈곤함 또한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곤경은 가족관계 안에서만 벌어지고 이야기는 사적인 상처와 고백 혹은 폭로뿐인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세계적인 자본의 권력은 맹위를 떨치고 있어요. 거대 권력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기를 바라왔습니다. 가장 들어야만 하는 목소리들은 늘 차단되어왔어요. 그래서 이야기꾼이 필요하지요. 이야기꾼은 늘 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했어요. 연결을 위해서 애쓰는 이야기꾼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어를 쓰는 이야기꾼이 필요해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란 믿음을 가진 이야기꾼이 필요하고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나쁜 짓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이야기꾼이 필요해요. 그런 이야기꾼들이 우리를 멀리 데리고 갈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끝없이 순환하는 문젯거리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거예요.

 혜윤  존. 저,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 이야기들을 수집하러 가고 싶어졌어요.

 존  그래요. 서둘러요. 빛과 분투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해법은 삶 안에 있으니까요. 창의력도 삶 안에 있고요.

 혜윤  존, 당신 친구들이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을까요?

 존  그럼요. 그들은 우리 이야기의 일부분이었어요. 그들의 목소리가 이야기 안에 녹아있어요.

 혜윤  그럼 그들에게도 말을 하고 싶어요. 하늘을 보면 되는 거죠?

 존  기왕이면 누워서 볼까요?

 혜윤  좋아요. 누워요. 안녕. 죽은 사람들! 만약 우리 모두가 당신 죽은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요? 저는 올 일 년간 매일 하늘을 볼게요. 그것은 저에게 쉬운 일이에요. 저는 퇴근할 때마다 달을 보거든요.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은 저에겐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그때 나타나주세요. 달에 언어를 써주세요! 은빛으로 빛나는 강철언어를 써주세요. 저는 이야기들을 들고 돌아올게요.

 존  좋네요.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네요. 이제 가야 해요. 내 친구가 저녁에 소가 새끼를 낳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늦으면 곤란해요. 난산이 될 것 같으니까요.

 혜윤  아쉬워요. 하고 싶은 말의 백만분의 일도 하지 않았는데 헤어지네요. 제 느낌에 저에게 인터뷰 요청이 다시 올 것 같아요. 그때 또 만나요! 사랑해요. 늘.


*필자 주 l 존 버거(John Berger)의 한글 표기는 ‘존 버저’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논란이 있어왔고, 존 자신은 살아 생전 존 버거든 존 버저든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는 입장이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 다만, 이미 그의 책이 존 버거로 번역되어 있어 독자들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부득불 존 버거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출판물에서는 존 버저라고 표기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는 존 버저로 정정되기를 바란다.

정혜윤
정혜윤
CBS라디오 프로듀서
저서 『뜻밖의 좋은 일』 『인생의 일요일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