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역사하는’ 작은 역사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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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역사하는’ 작은 역사가들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좀 설명해 주세요.”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의 『역사를 위한 변명』(Apologie pour l'histoire ou métier d'historien)의 첫 대목이다. 저 유명한 구절을 1970년대 초 대학에 들어가 역사학도로서 처음 접했다. 그 문구가 깊은 감명을 자아내 그 뒤 평생 내 마음속에 화두로 자리잡았다. 저자가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면서 집필하던 도중 붙잡혀 처형을 당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연도 크게 작용했다.
다들 힘겹게 감당하는 고난과 혼란의 시기였던 작년 줄곧 나는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1949·1989』(2021)이라는 책의 집필에 몰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한 집필 과정 내내 위의 질문은 나를 따라다녔다. 이 질문에 마주하면서, ‘나를 닦고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학문’[爲己之學]의 의미와 그런 학문이 사회변화를 위한 학문과 선순환을 이루는 공부길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은사 민두기 선생의 유저 『시간과의 경쟁』(2001)의 「후기」를 다시 한 번 음미했다.
“병석에 누워 이제 더 살 날이 몇 달 안 남았음을 선고받고서 학술 노력의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니 감개가 없을 수 없으나, 잠시 동안이나마 살다 간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담담한 마음으로 이 출판 후기를 쓴다”면서, 그럼에도 “후스의 말을 다시금 반추하고 싶은 심정은 있다”는 매우 절제된 함축적 문구로 마무리했다. 여기 언급된 중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 ‘후스[胡適]의 말’은 이런 내용이다. “만약 어떤 노력이 사상적으로 깊이 생각한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효과를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의 결과는 왕왕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클 수가 있습니다.”
문명사적 대전환을 요구하는 팬데믹 위기에서 나의 저술은 도대체 어떤 “효과를 발생할 것”인가. 그 답은 독자의 반응을 기다려봐야 알 터이나, 여기서는 내가 무엇을 목표로 책을 썼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 책은 대략 한 세대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발생한 세 사건에 대한 서술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100년간의 세 역사적 분수령을 재현하고 싶어서였다. 책 전체에 흐르는 주선율을 ‘민(民)의 결집과 자치의 경험’으로 잡고, 각 부의 변주로서 변혁주체의 궤적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1919년 5·4운동을 ‘신청년과 각계 민중연합의 시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당과 인민의 시대’, 1989년 천안문사건을 ‘군중자치의 순간’으로 파악하고 각각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런 구성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라는 ‘핵심현장’(동아시아 근현대사의 모순이 응결된 곳)의 기운을 받으면서 발효된 문제의식이 관통한다. 이 글을 읽는 이를 위해 귀띔하면, ‘민(民)의 결집과 자치의 경험’이란 주선율의 한 가닥으로 깔아둔 것이 개인과 국가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사유와 실천인데, 여기에는 한국현대사를 살아온 나 자신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는 주로 중국의 혁명수양론의 세 단계를 통해 설명할 것인데, 두 개의 열쇠말인 ‘사회변혁적 자아’와 ‘사회적 영성’이 길잡이다.
전자는 개인사의 오랜 사연에 닿아 있다. 대학에 입학해 정규교과에서 별 흥미를 못 느끼던 내가 학생동아리(이른바 이념서클)에 참여해 ‘소아(小我)’와 ‘대아(大我)’의 융합의 길에 대해 선배로부터 듣고 뛰는 가슴으로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꿈꾸던 때부터 형성된 문제의식이다. 이런 관심이 1970~80년대의 민족민주운동의 영향 속에 숙성되어 나의 박사학위논문(1994년에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로 출간됨)에 반영되었고, 그 일부가 이번 새 책의 제1부에도 스며들어 있다.
나는 5·4운동의 변혁주체를 ‘사회변혁적 자아’라는 발상으로 서술한다. 1911년의 정치변혁인 신해혁명의 성과에 실망한 당시 지식인·청년들이 좀 더 근원적인 변혁으로서 ‘정신혁명’ 곧 신문화운동에 열중한 1920년대에는 개인(당시 용어로 ‘소아’)이 사회(와 세계인류, 곧 ‘대아’)에 융합되길 바라는 새로운 인생관이 풍미했다. 5·4운동을 이끈 푸스녠[傅斯年]은 개성 곧 ‘소아’를 중시하되 ‘소아’가 자기의 노력에 의해 불멸의 ‘대아’인 사회나 역사에 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청년 마오쩌둥도 이 사유구조를 공유했지만, 점차 군중과 정당을 ‘대아’로 간주하는 변화를 보였다). 1차 대전 직후라는 문명전환기에 자아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청년들은 개인의 도덕적 순결성을 보장하는 각자의 이념에 따라 자발적인 결사체인 ‘소단체’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사회개조를 꿈꾸었다. 이처럼 ‘사회변혁’ 지향을 자기의 내면에서 받아들여 자아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한 인간형을 나는 ‘사회변혁적 자아’로 이름 붙였다.

5·4운동 후반기 그들은 신문화운동을 추진하는 소단체에서 추구한 개인의 수양이나(아나키즘의 영향 속에)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 향상을 강조하고 소규모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변혁할 수 없음을 곧 깨달았다. 자연스레 새로운 혁명 이념과 조직에 눈을 돌리면서, ‘주의(主義)의 시대’ 또는 ‘조직의 시대’라 훗날 일컬어지는 시기가 도래했다. 개인수양에서 혁명적 수양 또는 혁명적 인생관으로 관심이 옮아간 것이다. 이것이 100년 변혁의 중국에서 나타난,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의 병진의 역사적 계보의 첫 번째 단계이다.
1921년에 창당한 공산당과 국민당이 연합해 이끈 국민혁명에 참여해 혁명가의 길을 ‘걸을 만한 인생의 길’(곧 혁명인생관)로 선택한 청년들의 공통점은 더 이상 학생으로서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노동대중과의 일체감을 느끼도록 자기혁신에 힘쓰는 자세이다. 이렇게 ‘직업혁명가’들이 탄생했다.
중국공산당이 항일전쟁기부터 농촌의 근거지를 확대한 데 이어, 베이징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접수·관리하는 데 성공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흔히 계급혁명이나 토지재분배가 중시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정치 주체의 형성, 특히 ‘헌신적인 간부들’의 존재는 중요했다. 1920년대 국민혁명 이래 다수의 지식청년과 학생을 공산당이 포용하여 자신의 담론, 선전 및 조직의 골간으로 삼아 노농대중을 혁명세력으로 변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간부가 기층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함으로써 거대한 국가를 운영하는 데 관건적 매개체였다. 그런데 건국 초기 간부 개인과 혁명의 관계를 묻게 되는 윤리문제가 불거졌다. 군사적으로 승리해 베이징 등 주요 도시에 들어가 ‘전리품’을 접수·관리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당시 마오쩌둥이 ‘이자성(李自成)의 함정’이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명말 농민반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한 이자성의 세력이 도시에서 부패해 붕괴하고 만 일이 되풀이될까봐 우려된 까닭이다. 그래서 승자가 어떻게 다시 사회기반을 개조함으로써 자신을 개조할 것인가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요컨대 지도자가 어떻게 민중과 한 몸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통은 개인은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당의 원칙에 따라, “엄격한 조직생활, 전체 당원대회, 조사, 민주” 등의 조직 메커니즘에 의한 조정과 교정이 시행되었다. 이 같은 실천경험이 반복되면서 건국 초기 혁명 분위기가 일정 정도 유지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의 병진의 두 번째 단계이다.
사실 이 주제의 중요성은, 항일전을 전개하던 1930년대 옌안[延安]시기에 마오와 더불어 공산당을 이끈 류샤오치의 『공산당원의 수양을 논함』에서 이미 강조된 바 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 초창기부터 지식인의 도덕적 엄격주의가 입당의 중요한 동기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당시 지식인의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전통문명(특히 유학)의 수양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당원 개인의 도덕적 성찰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이익을 기준으로 각자의 당성(黨性) 수양을 강화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개인개조(내지 수양)를 사회개조에 종속된 것으로 보던 당내 풍조와 달리 그가 개인개조를 강조하면서 양자의 병진을 당원수양의 이론적 근거로 삼은 점에서 독창성이 드러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당의 원칙에 따라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의 병진을 수행하는 방식은 중국공산당 이론에서는 군중노선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군중으로부터 나와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정치노선이자 조직노선이다. 이는 공산당의 정책결정의 탄력성과 역동성에 일정 정도 기여해왔다. 중국이 변화하는 (위기)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 군중노선이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어떻게 참여자의 “공화욕구와 공화능력”, 곧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호에 표상된 공화라는 가치를 배양해왔는가가 문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화주의는 국가 사무와 정치를 군주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사무로 간주하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때의 도덕을 중시한다. 여기서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때의 도덕이란 “진리의 길로서의 도(道)와 도에서 나오는 힘으로서의 덕(德)”이어야 함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건국 이래 중국의 여러 군중운동이 과연 이 기준에 부합했는지 점검하는 일은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중국인민이 제대로 된 마음공부를 수반하지 않은 채 제도개혁을 통해서만 혁명을 이룩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묻는 시각에서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서 ‘신혁명사’란 이름으로 ‘문명’을 오늘날 중국의 ‘성공’(곧 대국화)을 가능하게 한 역량의 바탕으로 드높이는 담론이 중국에서 성행 중인 현상이 흥미롭다. 중국공산당과 국가권력이 일체가 된 체제(곧 당-국체제)도 서구형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간주되고 거기에 문명적 설명이 가해진다. 혁명의 문명사적 함의에 주목하는 경향이다.
그중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개인 내면의 심성’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한 중국학자는 내가 국제회의에서 소개한 ‘사회적 영성’ 개념에 촉발되어 유학전통과 혁명전통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즉 유학의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도정치를 행하는 것) 개념 속에 이미 ‘사회적 영성’의 지향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중국사회의 변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개인이 자신에 내재된 초월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총체적인 사회변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영성’을 매개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했지만, 기존의 혁명수양론의 구도에 머문 느낌이다. 이래서는 혁명수양론에 내재된 (개인의) 자발성과 (당과의) 위계성 사이의 긴장이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고, 개인의 정치적 효능감[efficacy]을 이끌어내기에는 더더욱 미흡하다. 이것이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의 병진의 세 번째 단계라 하겠다.
이쯤해서 또 하나의 열쇠말인 ‘사회적 영성’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사회적 영성이란 한 개인의 경험을 종교성 안에서 해석해냄으로써 개인의 삶과 사회적 질을 동시에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경험을 해석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변화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을 변화케 하는 상호적인 과정을 가리킨다. 이는 한국에서 세월호 사건(2014년)을 겪고 난 뒤 ‘타자됨의 영성’의 흔적들을 찾아내 증언하며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려 애쓴 우리 지식인들의 지적인 성과이다. ‘영성’의 발현은 2016년 말과 2017년 초, 촛불광장에서도 이루어졌다.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는 제도개혁에 그치지 않는 더 깊은 열망이 있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했던 당시의 열기를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사회적 영성’이란 개념을 적극 수용해 우리 사상사를 다시 보는 동시에 이웃 동아시아 지식인들과 대화하는 장으로 삼고자 했다. 위에 소개된 사례는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이 개념이 중국에서 활용된 사례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 중국에서 이뤄지는 논의에 비평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내가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자주 듣는 질문을 바꿔, 중국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제의해 온 이유이고, 비대칭적 양자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근거이다.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과 문명의 의미가 어디서나 뜨거운 쟁점이다. 개인과 국가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국가 비판이라는 상투적 담론을 고수하며 진보적인 입장을 지키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의 개입에 비판적 정치의식 없이 협력하려 드는 것도 아닌, 국가 개입 자체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다. 내가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의 병진의 역사적 계보를 100년 변혁의 중국에서 검토한 것은, 그것을 나라 다스리기의 새 틀과 대안적 문명담론의 보편적 특성으로 꼽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학습하며 혁신해 갈지는 그들의 몫이지만, 중국을 단순히 혐오·멸시 감정에 휘둘려 보지 않고 그들이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며, 그에 비춰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개인수양 과정에서 변화된 새로운 자아가 (지구적 규모의 신자유주의가 조성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사회변혁적 자아의 고양된 형태인) 사회적 영성을 집단적으로 회복하여야 ‘개인들이 힘 있는 주체가 되고 세력화된 민주주의’ 곧 한층 더 좋은 민주주의로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민주적 집단의 주체성과 연대의 기제를 표현할 좀 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중국과 한국 모두 서로가 터득한 경험을 겸허하게 존중하는 역사감각이 요구된다.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을 집필한 목표는 바로 이 상호 학습과 성찰을 요청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를 역사의 효용과 학술작업의 효과에 대한 앞선 시대 학자들의 농축된 감회를 인용하면서 시작했다. 마무리에서도 인용을 하려고 한다.

“역사 지식을 가지는 것 자체가 거의 혁명적인 일이 되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 리베카 솔닛 인터뷰, 「평등한 세상은 평등한 과정에서」,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이런 역사 이해를 나는 ‘역사하다’로 부른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일순간의 행위나 발언의 결과로서 역사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변화하는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을 체득하는 일이 바로 ‘역사하다’를 평소 수행하는 작업이다. 그 수행자의 다른 이름은 일상생활 속의 ‘작은 역사가’일 터인데, 그들을 만나는 기쁨이 내 작업의 원동력이다.
백영서
백영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세교연구소 이사장, 1953년생
저서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共生への道と核心現場: 實踐課題としての東アジア
(공생의 길과 핵심현장: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 『사회인문학의 길』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