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①
온몸의 존재 : 바람과 양극의 긴장

  • 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①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온몸의 존재 : 바람과 양극의 긴장

편집자 주 l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작품에 드러난 온몸의 철학을 주제별로 살펴보는 특별코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온몸의 존재 / 2. 온몸의 사유 / 3. 온몸의 시학 / 4. 온몸의 윤리

김수영
(1921~1968) 시인.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1. 김수영과 온몸의 존재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1968) 전문



올해는 김수영 탄생 100주년이다. 시인이 남긴 유산을 되짚어 볼 만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무엇인가? 나로서는 온몸이란 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방 후 한국 인문학이 생산한 독창적 개념들은 그렇게 흔치 않다. 온몸은 한국 인문학 첫 세대가 드물게 싹 틔운 몇몇 자생적 개념들에 속한다. 게다가 그것은 어떤 체계적인 사상의 가능성을 담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나에게 김수영의 온몸은 만개하기를 기다리는 어떤 철학의 씨앗과 같다.
온몸이란 말 아래 우리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시인의 포즈를 생각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몸을 불사르며 역사의 한복판을 통과했던 시인의 인격과 삶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의 단어 ‘온몸’에는 예술가의 윤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정확히 정직성의 윤리다. 그러나 온몸은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학을 집약한다. 이 단어는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발표한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1968)의 내용 전체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시란 무엇인가? 오래도록 이 물음과 싸웠던 김수영은 마침내 커다랗게 외친다. 시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강렬한 문장은 시를 정의하는 명제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특정한 논리의 사유 문법과 특정한 구도의 존재 이해가 녹아 있다. 온몸이 한편으로는 시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로 줄기를 틀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말은 어떤 심오한 존재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김수영의 온몸은 사면체의 개념이다. 거기에는 존재에 대한 물음, 사유에 대한 물음, 시에 대한 물음, 그리고 윤리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온몸의 존재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를 위해 「시여, 침을 뱉어라」로 돌아가 보자.
이 글의 도발적인 제목 때문에 독자들은 부제를 쉽게 잊는다.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이것이 부

제다. 저자가 시의 본성을 존재론의 수준에서부터 돌아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존재론인가? 부제를 보면 분명하다. 그것은 힘의 존재론이다. 사실 힘은 언젠가부터 김수영 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가령 「한국인의 애수」(1965) 같은 산문은 한민족 고유의 정서로 치부되는 애수에 반하여 힘의 범주를 마주 세운다. 당시의 유행가, 영화, 소설, 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일반화되고 있는 통곡의 한국학을 질타하면서 “진정한 예술 작품은 애수를 넘어선 힘의 세계”(『김수영 전집 2』, 429쪽)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는 공식은 이런 성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이 힘에 있다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약을 통해 힘은 미학적 범주 이상의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이미 존재론적 범주로 심화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 요약적인 공식이 함축하는 존재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하나는 질료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의 측면이다. 질료의 측면에서 힘은 바람으로 표상된다. 구조의 측면에서 힘은 어떤 양극(兩極)의 긴장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김수영 전집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시여, 침을 뱉어라」와 같은 해에 발표된 「반시론」(1968)을 보자. 이 산문 후반부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최근작 「미인」에 대해 상당히 길게 논한다. 이 시는 미인과 한 방에서 식사를 하던 중 담배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여는 장면으로 끝난다. 김수영은 이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나는 노상 그러하듯 조용히 운산(運算)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창문을 연 것은 담배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천사 같은 훈기를 내보내려고 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됐다! 이 작품은 합격이다. 창문 ― 담배 · 연기 ― 바람. 그렇다, 바람.”(앞의 책, 512쪽)
이런 문장에 이어 김수영은 릴케의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와 헤르더의 「인류의 역사철학적 고찰」을 길게 인용한다. 이는 자신의 바람을 이런 글에 나오는 “신적인 입김”이나 “신적인 미풍”과 연결하기 위함이다. 사실 그리스 말 프시케(psyche)는 영혼을 의미하지만,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바람을 가리켰다. 서양에서 바람은 영적인 생명과 힘을 은유한다. 영적인 생명과 힘, 그것은 새로움의 원천이자 조형의 원리기도 하다. 이런 서양적 은유의 세계로 돌아가 「미인」의 작품성을 논할 때 김수영은 잠시 후 쓰게 될 최후의 시 「풀」(1968)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걸출한 작품은 풀의 노래이자 바람의 노래다. 이 노래에서 바람은 풀이 맞서 싸우는 어떤 운명적인 힘처럼 읽힌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면 누워 울어야 했던 풀이다. 그런 풀이 언젠가부터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일어난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더 빨리 웃는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마지막 문장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풀이 도달한 자유를 함축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타율에서 벗어난 상태, 자율로서의 자유다.
외부의 지배력에서 해방된 자기 충족적인 상태인데, 그것은 정확히 풀이 자신의 고유한 ‘뿌리’를 발견하고 그 뿌리와 관계함에 따라 성취된다. 이렇게 보면 「풀」에서 바람은 자연의 힘이다. 반면 풀은 자신의 내면적인 힘의 원천에 도달한 주체, 혹은 자신의 고유한 (탈)근거 위에 서 있는 주체다. 우리는 이런 유사한 대극 구조를 10년 전쯤의 작품 「채소밭 가에서」(1957)도 볼 수 있다. 이 시는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로 시작해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로 끝난다. 그리고 그 사이 중간 행들은 한결같이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를 반복하면서 달리아가 피어 있는 채소밭을 그린다.
여기서 강바람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초적 기운을 대신한다. 모든 자연적인 생은 바람에 실려 오는 기운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 자연의 기운을 호흡하면서 생명을 부지한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노래(서정주의 「자화상」)를 연상해도 좋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인 삶은 그렇게 들이마신 자연의 기운을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내뱉을 때 시작될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 시는 자연에는 없는 침을 내뱉는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또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는 반복구다. 그것은 자연의 힘 속으로 함몰되기 쉬운 정신이 자신에게 스스로 시동을 거는 자기함량 운동의 구호다.
함량을 더해가는 내면적인 기운과 부딪힐 때 강바람 소리는 어떤 음악이 된다. 농도를 더해가는 자신만의 기운을 뿜어낼 때 채소밭가의 달리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설 수 있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이 마지막 구절에서 ‘너’는 시인일 수도, 시 속의 달리아나 채소일 수도, 후일의 풀일 수도 있다. 달리아, 채소, 풀, 이것들은 모두 바람 속에서 태어나 자라나서 마침내 바람을 벗어나는 시적 주체다. 바람에 삼켜질 위험과 절망을 탈각하고 자신의 고유한 힘에 도달하는 시적 주체. 그것이 또한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 온갖 적들과 함께 / 적들의 적들과 함께 / 무한한 연습과 함께”(1961년 작 「아픈 몸이」)라고 외치는 주체다.
그 무한한 연습, 무한한 이행의 연습은 후일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으로 다시 정식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행이 어떤 대극적 긴장의 통과에 해당한다는 데 있다. 그 긴장은 자연과 정신, 예속과 해방, 적과 동지 같은 단순한 이항대립 구조에서만 오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작은 구조의 안과 밖 사이에서 성립하는 큰 구조에서 온다. 김수영은 그것을 사랑과 죽음, 혹은 풍자와 해탈의 양극 구조로 정리한다. 이것이 온몸의 존재론이 함축하는 구조적 측면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지면에서 다루어보도록 하자.

김상환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김수영론: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과 논어』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왜 칸트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