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김수영문학관’을 지키는 명예관장 김수명 선생과의 대화

  • 대산초대석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김수영문학관’을 지키는 명예관장 김수명 선생과의 대화

 

여태천
시인,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1년생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 비평집 『시적 정의와 시의 윤리』 『경계의 언어와 시적 실험』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 『김수영의 시와 언어』 등

김수명
김수영 시인의 누이동생, 김수영문학관 명예관장, 1934년생

김수명.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영 시인의 누이동생’, ‘김수영문학관 명예관장’, 문인은 아니었지만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김수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수영 시인에 대한 평가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동생 김수명의 역할이 컸다고 많은 문인, 연구자 들은 종종 이야기한다. 현재 도봉구에 위치한 김수영문학관 명예관장으로 계시는 김수명 선생님을 서면으로 만났다.

여태천 선생님 반갑습니다. 2018년 김수영문학관에서 ‘김수영과 나 그리고 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무렵에 처음 뵙고 다시 인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조금씩 일상으로의 회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수명 아침에 일어나서 조간신문 보고, 직접 밥해 먹고, 시간 나면 책 읽고 산책도 합니다. 하지만 옛날 같지 않죠. 여기저기 원인도 모르게 아픈 데가 많아지고 운신이 둔해지니까 포기하는 일들이 늘고 단순해져갑니다. 당연한 변화인 걸 어쩌겠느냐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여태천 요즘 사람들은 일어나자마나 스마트폰에 손이 가는데, 선생님께선 조간신문을 보신다니 어딘가 별세계 같은 느낌입니다.
2021년은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연히 김수영 시인과 시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이뤄질 텐데요. 그것과는 별도로 김수영 시인을 있게 한 김수명이라는 주제로 선생님께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현대문학에서 일하셨는데요. 언제, 어떤 계기로 현대문학에 입사하게 되셨나요?

김수명 1955년 고려대학교 고대신문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했습니다. 한 사람 채용에는 못 들고 학교 측 알선으로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방계회사인 문화당에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검인정 교과서를 출판하는 그곳의 교정원으로요. 그 문화당과 또 다른 대한교과서 방계회사인 현대문학이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무실 안에 두 업체가 들어있었던 셈이죠. 자연스럽게 낯을 익히면서 지내다가 문화당의 일이 중단되면서 현대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겁니다. 문단 분들은 오빠의 도움이 있는 줄 아는데 오빠는 그런 부탁을 못 하는 사람입니다.

여태천 시인 김수영은 절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요즘 여러 가지 이유로 문학의 위상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문학잡지도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1960~70년대는 문학이 그래도 존중받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문학잡지의 역할도 그래서 꽤 컸을 텐데, 당시 현대문학에서 일하고 계실 무렵 잡지 위상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김수명 그 당시 잡지 《현대문학》은 독주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문학》, 《문학춘추》 등 많은 잡지들이 나왔지만 《현대문학》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죠.

1966년경 《현대문학》 주간 조연현 평론가와 함께  

 

여태천 문단 상황이 그랬다면 편집장의 위상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어땠습니까?

김수명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편집장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문학을 모르는데 문학적 소신이나 주관이 서있었겠습니까.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 수준이었죠. 책을 제작하는 일, 체계가 전혀 잡히지 않은 주먹구구식 경영을 하나하나 기틀을 마련해 나가면서 제대로 된 운영체제로 이룬 부분엔 자부심을 갖습니다. 원로 몇 분을 제외하고는 원고료 없이 게재만이 당연시되었던 그때 아주 작은 금액이라도 고료를 책정하고 지급했던 일은 그중 잘한 결정이었다고 추억합니다. 약 20년 가까이 200여권 넘게 책을 꾸몄지만 월급에 매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 창작물을 내는 것처럼 몰입했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1967년경 김수영 시인

 

 









2021년 1월 김수명 여사

 

여태천 원고를 앞에 두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이 갑니다. 제 경우엔 작품을 읽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요즘 편집자들 중에 등단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창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는지요? 혹,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있으신지요?

김수명 아뇨. 신문에 짧은 수필 같은 것을 몇 편 썼을 뿐입니다. 오빠 김수영의 글 교정을 보면서도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요.

여태천 선생님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대문학》의 편집장으로 계셨습니다. 꽤 긴 시간입니다. 당시 주간은 조연현 선생님이셨죠. 그 당시 현대문학을 드나들었던 숱한 문인들이 있었을 텐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으시다면?

김수명 그때는 거의 직접 방문으로 교류가 이뤄진 때라 지금과는 다르게 수많은 문인들을 가까이 볼 수 있었죠. 하지만 누구를, 어떤 일을 지목해 주시지 않으면 특별히 기억되는 일을 가려낼 수 없습니다.

여태천 시인, 작가 들은 대체로 예나 지금이나 조금 괴팍하죠. 그래도 여러 문인들을 만나셨으니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거나 호감을 가졌던 문인도 있었을 텐데요? 말썽을 피웠거나 곤혹스럽게 했던 문인은 없었나요?

김수명 실명을 거론해서 말썽을 피운 분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일 자주 곤욕을 치른 일은 자기 작품을 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문인들을 이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거칠게 행패를 부리던 분도 있었지만 실명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태천 그분이 누구신지 무척 궁금하지만, 선생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편집장으로서 한 권 한 권의 잡지에 몰두하고 정성을 다하셨으니, 마치 자식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편집한 《현대문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호가 있다면, 몇 호인지, 그 이유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수명 1965년 3월 초에 게재된 남정현 작가의 「분지」 필화 사건. 그 작품 교정을 제가 봤고, 그로 해서 며칠 동안 당국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작은방에 앉혀 놓고 진술서 쓰고 또 쓰고…… 그때는 그게 처음 겪는 일이어서 무척 공포스러웠습니다.

여태천 「분지」 필화 사건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전횡과 횡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죠. 1967
년 5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던 작가 남정현 선생님이 2020년 12월 87세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었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그 작품 교정을 하시고 그 일로 고초를 겪으셨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분위기를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2003년이었습니다. 황동규 시인이 「2003년 봄 편지 - 퇴직 전 마지막 봄, 김수명 선생에게」를 《문학수첩》 겨울호에 발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父子에 걸친 ‘반세기 우정’에 바칩니다”라는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인 황순원 선생의 ‘정신적 연인’이자 자신과도 오랜 술친구였던 김수명 여사에게 시를 헌사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당시 황동규 시인의 시와 인터뷰 기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답변은 하셨는지요?

김수명 제게 넘치는 관심이나 애정을 베풀어주신 분들에게 일일이 표시는 안 했어도 마음속에 고마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태천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아직도 김수영의 시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 또한 연구자로서 김수영 시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데요. 독자의 입장에서 김수영의 시의 매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수명 ‘김수영 시의 매력은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태천 그 점 때문에 김수영 시를 읽을 때마다 벌거벗은 느낌을 받는 독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김수영 시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사랑의 변주곡」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데, 작품의 어떤 점이 선생님의 마음을 끌어당겼을까요? 그 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지요?

김수명 「사랑의 변주곡」은 연극 대사를 토해내는 것 같은 강렬한 울림이 전달되어 옵니다. 그 외에 좋아하는 작품은 「사랑」, 「봄밤」입니다.

여태천 저도 「사랑의 변주곡」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는 그 장엄하고 진실한 어조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멋진 내레이션이란 생각이 드네요. 참, 김수영 시인이 작품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혹은 발표 이후에라도 생긴 흥미로운 일은 없었나요? 아니면 특별히 문제가 발생했던 경우라든가?

김수명 본인 생각으로 검열에 걸릴 것 같은, 어떤 문제가 될성부른 작품은 제게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후 시 연보를 보고 짐작을 했죠.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태천 김수영 시인이 매우 예민한 성격이었던 걸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에도 그런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의 특이한 버릇이랄까, 습관 같은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수명 시를 완성한 다음엔 남에게 정서를 시킵니다. 그럴 때 그는 약간 자랑스러운 듯, 또 한편 무안한 듯 마른 코를 훌쩍이면서 지켜봅니다. 꼭 우등상장 내밀고 서 있는 어린애 같은 모습입니다.

여태천 쑥스러워하는 김수영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 독자들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김수영 시인이 가깝게 지냈거나, 혹은 특별히 경계했던,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시인이 있었을까요?

김수명 가깝게 지냈던 문인으로는 이봉구, 유정, 김이석, 박태진, 박연희, 김중희, 김장호. 존경했던 선배 문인은 조지훈, 김광석, 안수길, 김기림, 임화를 꼽고 싶군요.

여태천 시인 김수영이 아니라 오빠 김수영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빠 김수영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동생을 잘 챙기는 그런 오빠였는지, 아니면 근엄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수명 장남으로 태어났으면서 가족 일은 나 몰라라 공부에만 빠져 살던 오빠로 인해 생활면에서 우리 형제들은 힘들 수밖에 없었죠. 차츰 철이 들면서 저는 그를 평범하지 않은 사람, 감싸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고 또한 몸소 보여주고 간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까요. 부단히 사랑을 강조하고 정직을 강조하고 성실을 강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장남으로서 경제적으로는 낙제였지만 정신적인 장남 역할은 제대로 남기고 간 사람입니다.

여태천 시 「누이야 장하고나!」, 「누이의 방」에 ‘누이’가 등장합니다. 이 ‘누이’가 늘 궁금했습니다. 뭐랄까요, 시인의 또 다른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김수명 선생님이신가요? 이 작품들이 씌어질 무렵 선생님 방의 실제 풍경은 어땠습니까?

김수명 네. 저 맞습니다. 대여섯 평 되는 방이었는데 본채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지요. 오빠는 집중이 필요한 원고를 쓸 때는 제 방을 빌렸습니다.

여태천 1961년 김수영 시인과 함께 막냇동생의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미인이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십니다. 당시 미인으로 문단에 소문이 자자했던 여동생을 둔 김수영 시인이 여동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수명 한참 아래 동생인 저를 존중하고 믿는 면은 있었지만. 글쎄요,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회생활을 고지식하게 하는 저를 조금은 안쓰럽게 여겼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여태천 고지식한 것으로야 김수영 시인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그게 안쓰러웠을 수 있겠네요. 김수영문학관 건립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김수영 시인이 지금의 문학관을 보신다면 마음에 들어 할까요?

김수명 2011년 처음 도봉구청에서 문학관 설립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우선 ‘오빠가 바라는 일일까?’,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게 될까?’ 등등의 고민을 했었습니다. 분명한 건 시인 김수영은 아예 문학관 건립을 못 하게 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형제들과 오랜 의논 끝에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김수영을 알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장소로 오래 보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태천 누이동생으로서 선생님께서는 김수영 시인이 독자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는지요.

김수명 ‘자유와 시의 절대성을 치열하게 추구했던 시인’, ‘자기 학대에 이를 정도로 부단한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보여주었던 시인’으로 기억되기 바랍니다.

여태천 말씀처럼 김수영 시인은 치열했죠. 특히 자신과의 싸움에서,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수명 이제 와서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겠습니까. 곧 손을 놓게 될 텐데 그전에 오빠에 관한 자료나 기록들을 재정리, 보완하는 일을 마저 해야겠습니다.

여태천 답하시기 어려운 질문들이 많았을 텐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여태천
여태천
시인,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1년생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 비평집 『시적 정의와 시의 윤리』 『경계의 언어와 시적 실험』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 『김수영의 시와 언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