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
‘시대의 양심’이 전하는 사랑과 연민, 정의와 연대의 이야기

- 블라디미르 코롤렌코 소설집 『맹인악사』

  • 명작순례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시대의 양심’이 전하는 사랑과 연민, 정의와 연대의 이야기

- 블라디미르 코롤렌코 소설집 『맹인악사』

  

오원교 번역가, 러시아문학·유라시아문화 연구가, 1966년생 공저 『해체와 노스탤지어』 『예술이 꿈꾼 러시아혁명』, 역서 『공산주의 이후 이슬람』 등 올해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비평가, 사회활동가로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커다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1853~1921)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다.

제정러시아의 황혼에서 10월 혁명과 내전으로 얼룩진 소비에트러시아의 여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역사의 최대 격변기를 살았던 작가 코롤렌코는 ‘창조적 작가이자 열정적 투사’로 자처하면서 예술과 인생 사이를 가장 진지하고 치열하게 길항했던 러시아 인도주의 문학의 거성이자 앎과 삶의 일치를 부단히 추구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진정한 표상이었다.

코롤렌코의 삶과 문학은 온갖 고난과 역경, 도전과 성취로 점철된 ‘시대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었다. 작가 코롤렌코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일찍이 변혁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인민주의 학생운동에 가담하였고 이어 혁명운동과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로 무려 8년여에 걸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었다. 작가는 쓰라린 유형 생활에서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강렬한 지향을 배양했고, 러시아와 국외 여행을 통해 인간과 사회(자연)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심리적·철학적 통찰을 획득했다. 코롤렌코는 평생토록 민중에 대한 책무, 그들의 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간직했다. 더불어 당대의 중대한 역사적 문제들에 대해 특유의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 견해를 개진했다. 예컨대 차르 체제의 전횡과 반동 정책을 질타하고 동시에 10월 혁명에서 볼셰비키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동원했던 반인간적 방법과 수단에 대해 비판했으며 나아가 내전의 야수성을 가감 없이 폭로했다.

이렇듯 코롤렌코는 탁월한 언어 예술가이자 열렬한 사회 활동가로서 평생 동안 ‘힘겨운 영웅의 길’을 걸어간 ‘시대의 양심’, ‘해맑은 영혼’이었다. 코롤렌코가 삶에서 연마한 참다운 도덕적·철학적 지향은 문학에서 고유한 예술적·미학적 형식으로 구현되었다. “새가 날기 위해 태어나듯이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난다”는 작가의 말에서 암시되듯이, 코롤렌코의 문학은 행복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지향과 그것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믿음, 자유와 정의에 대한 끝없는 추구, 폭력과 부정에 대한 불굴의 저항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도덕적·정신적 완성의 지향 등으로 충만하다. 이번 역서에 담긴 코롤렌코의 중·단편소설들, 「마카르의 꿈」, 「나쁜 패거리」, 「숲이 술렁거린다」, 「맹인 악사」는 작가의 이러한 진보성과 인본성을 가장 탁월하고 심오하게 구현한 대표 작품들이다.

코롤렌코에게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마카르의 꿈」은 유형 생활의 체험에 기초한 일종의 ‘성탄절 이야기’로서 한 편의 동화이다. 이 작품은 간결한 유머를 바탕에 깔고 헐벗고 무지하며 죄 많은 농부 마카르의 현실과 꿈의 대비를 통해 부정한 사회구조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비참한 민중의 삶에 대한 통렬한 연민을 함께 제시한다. 마카르로 상징되는 민중의 전형적 참상에 대한 인간적 공감이 오직 평범하고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작품의 또 다른 전언이다.

「나쁜 패거리」는 어린 시절의 체험에 근거한 자전적 작품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그것에 대항하는 아이들 사이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특유의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이른바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시베리아의 방랑자 틔부르치는 자유, 긍지, 자주, 서정의 담지자로서 고리키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낭만적 부랑자의 선구적 형상으로도 간주되는데, 그로부터 작가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끝없는 열정이 감지된다.

「숲이 술렁거린다」는 ‘폴례시예의 전설’의 형식을 지닌 작품으로 남러시아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오직 자유를 위해 현실의 불의에 과감히 도전하는 산지기 로만과 카자크 오파나스의 형상은 음울하고 낭만적인 서사로 그려진다. 이들의 저항은 맹목적이고 거칠지만 그들의 주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거대한데, 이러한 모습이 숲과 폭풍우의 이미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지막 순간에 압제자 판에게 몰아닥친 정의는 작품 내내 숲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폭풍우의 엄습처럼 갑작스럽고도 불가피하며 예리하다.

마지막으로 자전적 중편 「맹인 악사」는 우크라이나의 자연, 역사, 문화에 대한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뿐만 아니라 빛으로 상징되는 삶의 완성에 대한 맹인 주인공의 지난한 추구를 통해 인간 자체에 대한 담대한 신뢰를 드러낸다. 특히 이기적 추구가 아니라 이타적 연대를 통한 삶의 완성, 혹은 불행한 사람들과의 공감과 나눔이라는 타인들에 대한 일관된 복무는 깊은 울림을 낳는다. 작가가 실토했듯이 이 작품은 간단치 않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내면세계와 외적 행위에 대한 내밀한 ‘심리학적 탐구’이자 ‘존재의 충만에 대한 범인간적 추구’의 의미심장한 결실이다. 이 작품은 1886년 처음 발표한 이후 여섯 번에 걸쳐 개작될 정도로 코롤렌코가 심혈을 기울인 대표작으로, 러시아와 해외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1960, 모스필름)되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사랑 혹은 지향으로서 행복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품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 기반한 코롤렌코의 작품들은 억압과 부정이 넘쳐나는 당대 현실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메시지를 든든하게 전해준다. 이에 동시대 문학가인 체홉은 작가의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기예를 찬탄했고 부닌은 건강하고 순결한 작가의 거인적 풍모를 추앙했으며 고리키는 작가에 대한 불굴의 신뢰와 존경과 긍지를 피력했다. 하여,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과 강직한 양심을 지닌 작가인 코롤렌코의 가장 이상적이고 걸출한 성취인 문학 작품들은 당대를 넘어 현대에도 영원한 울림을 자아낸다.

 

※ 『맹인악사』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2021년 발간되었다.

오원교
번역가, 러시아문학·유라시아문화 연구가, 1966년생
공저 『해체와 노스탤지어』 『예술이 꿈꾼 러시아혁명』, 역서 『공산주의 이후 이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