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리뷰
한국전쟁의 질곡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을 러시아에 심다

- 러시아어역 황순원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

  • 번역서리뷰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한국전쟁의 질곡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을 러시아에 심다

- 러시아어역 황순원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

 

2020년 한국과 러시아는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두 나라의 교류 역사는 오래전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나,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러시아, 아니 소련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고, 서울올림픽 개최 즈음해서야 ‘북방외교’로 다시 만났다. 서울과 모스크바 도서전에 서로 주빈국으로 참가하는 것을 포함한 여러 행사가 계획되었지만 대부분 비대면 방식으로 축소 진행되어 아쉽다. 화려한 이벤트들이 빛을 보지 못한 만큼, 문학 번역처럼 차분하고 내실 있는 작업이 돋보이는 해이기도 했다. 양국 문학번역원이 협력해서 5권씩 작품집을 번역하는 5+5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았고, 박종소 교수와 엘레나 김이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 끝에 번역을 완료한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러시아에서 출간된 것도 퍽 기쁜 소식이다. 다시 만난 러시아와의 문학 교류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황순원의 대표작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러시아인들이 ‘어머니 강’으로 일컫는 볼가강 중류 도시 사라토프를 몇 해 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조형물로 향하는 계단 층층마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도시 이름이 연도별로 기록되었는데, 1945년 계단에 발을 디디니 큼지막한 글씨로 ‘평양’이 눈앞에 다가왔다. 한반도를 바라보는 옛 소련의 시선이 그랬다. 한국전쟁 관련 기억 또한, 미국과의 대결이라는 경직된 이념적 틀 안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기념탑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른 민속박물관 초입에는 글로벌 시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 몇몇 나라 수도 이름과 직선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서 있다. 구 소연방 소속 공화국 도시 이름들 사이로 ‘서울 6275km’이라는 표지판이 머나먼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양보다 남쪽에 있는 서울이 그만큼 러시아와 가까워졌다는 걸까.

아무튼 러시아에는 두 개의 ‘카레야’가 있다. 문학 번역의 경우도 그렇다.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동양학자들이 1950년대부터 우리 고전 및 중세 문학 주요 작품 상당수를 번역 출간한 일은 세계한국학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업적에 해당한다. 한동안 북한 문학 번역 작업 또한 활발히 이뤄졌고, 이기영의 『땅』(1953)과 『고향』(1967), 강경애의 『인간문제』(1955), 송영의 희곡 『강화도』(1957), 한설야의 『황혼』(1958)과 『대동강』(1961), 박웅걸의 『조국』(1962), 현희균의 『청춘의 고향』(1974) 등 다수 작품이 러시아어로 출간되었다.

한국 문학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수교 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무렵부터다. 체제 전환기 러시아 출판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전문인력 부족 때문에 초창기에 우리 문학 번역과 출판은 순탄치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젊은 세대 번역가들이 등장했고, 한국 문학 출간을 달가워하지 않던 러시아 출판계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출간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기페리온’은 동양 문학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출판사로 우리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번역 도서 수십여 권을 이미 내놓은 바 있으며, 모스크바의 문학 전문출판사들 또한 특정 한국 작가의 번역을 자신들이 제안해올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까지 60여 권에 달하는 한국 문학 작품이 러시아어로 출간되었으니, 러시아 문학의 한국 유입만 있던 과거의 일방적 문학 교류가 공감과 대화를 지향하는 쌍방향 교류로 전환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것은, 번역 대상이 현재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에 치중된 나머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난 세기 후반 대표작들의 소개가 미흡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안겨준 깊은 정신적 상처와 절망, 그 속에서 이들이 맞닥뜨린 ‘자유와 책임’의 문제, 살아남은 자들이 고통과 좌절의 질곡에서 발견한 한 줄기의 희망 등을 독창적으로 다룬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러시아어 판 출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크림전쟁, 공산혁명에 뒤이은 내전, 2차 세계대전, 아프간 전쟁, 체첸 전쟁 등을 겪어온 러시아는 ‘전쟁문학’의 수많은 걸작을 배출했다. 발표 후 60년 만에 가독성 높은 러시아 예술 언어로 새롭게 탄생한 황순원의 대표 소설이 러시아 독자들을, 분단 상황 속의 한국, 그리고 한국적 정신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더불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들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길로 안내할 것으로 믿는다.


※ 러시아어역 『나무들 비탈에 서다(Деревья на косогоре)』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박종소, 김엘레나의 번역으로 2020년 기페리온(Hyperion)에서 발간되었다.

김현택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명예교수, 1956년생
저서 『붉은 광장의 아이스링크; 문화로 읽는 오늘의 러시아』 『사바틴에서 푸시킨까지: 한국 속 러시아 발자취 150년』 『대륙의 미학, 역설의 시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