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보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더 애틋하고 아름답다

- 켄트 하루프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vs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 원작 대 영화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보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더 애틋하고 아름답다

- 켄트 하루프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vs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아무래도 이 방법이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을 선입견 없이 조금이라도 더 넓고 깊고 애잔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이려면 어쭙잖은 견해나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들먹여 산통을 깨는 것보다 이야기부터 들어보는 것이.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금은 뜬금없다. ‘그러던’이라니. 무엇이 그러했단 말인가. 5월의 저녁, 미국 콜로라도의 작은 마을에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지만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던 남녀가 마주했다. 여자(애디)가 머뭇거리면서 제안을 한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남자의 “왜?”는 당연한 질문이다. “우리 둘은 혼자잖아요. 혼자가 된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라는 애디의 단도직입에 ‘그러던’과 ‘왜’에 대한 답이 동시에 들어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자러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쩌자는 것인가.

애디와 루이스가 청춘,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년만 되어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답은 하나이다. 그러나 애디와 루이스는 70대 노인이다. 루이스는 물론 우리가 예상한 답은 틀리다. 이를 상기시키듯 애디는 “섹스는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 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라고 말한다.

애디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루이스를 동침자로 선택했을까. 단지 그가 가까이에 살아서? 아니다. 평소에 “당신은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대로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 루이스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용기를 내어 애디의 집으로 가서 불면에 시달리던 그녀의 침대에 함께 누워 대화를 나누다가 잠을 잔다. 쓸쓸하고 외로운 영혼을 서로 달래주는 그들의 순수한 용기와 도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 이상 관심 갖지 않기로 했다.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애디의 제안대로 ‘거짓’없는 둘의 대화가 시냇물 흐르듯 인용부호 없는 문장으로 쉼 없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하고는 지켜주고 때론 조금씩 맞춰 간다. 과거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스며있는 상처와 아픔과 연민을 불러내서는 과장된 공감 없이 위로한다. 오랜 세월 각자 쌓은 것들, 삶에 연결된 것들은 좋든 싫든 그대로의 역사로 두고서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당연히 주변에서 수군거린다. 그러면 어떤가. 그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자신이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이 왜 남부끄러운 일인가. 두 사람에게 그것은 “자유로워지겠다는 일종의 결단”이며, 그 나이에도 가능한 일이 됐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함께 하고, 중심가를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는다.

격정이나 도발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늙어 힘이 없고, 자신들의 모습이 마을의 뉴스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육체적 관계도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함께 누워서 나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고, 누군가 내가 궁금해 하는 이야기들을 거짓 없이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잠들고 싶다. 그것만으로 둘의 영혼은 따스한 위안과 평화, 작은 즐거움으로 채워지고 윤기를 조금씩 되찾는다.

둘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애디의 옆집에 사는 노파 루스가 이따금 그들의 선택과 용기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애디의 아들 진이 사업실패와 아내와의 불화로 잠시 맡긴 어린 손자 제이미가 불청객처럼 등장하지만 루이스는 자기 손자처럼, 때론 친구처럼 반려견과 운동, 캠핑으로 아이의 불안과 두려움, 상처를 쓰다듬어 준다.

상처 없는 삶이 어디에 있으랴. 교통사고로 딸을 잃으면서 아들과 남편과는 단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낸 애디, 한때 외도로 아내와 딸에게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자기 연민에 빠졌던 루이스가 나지막이 주고받는 삶의 회환과 연민을 듣고 있노라면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정작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데 내가 아프다. 너무나 섬세한 이 소설이 루이스와 비슷한 나이인 71세로 세상을 떠난 켄트 하루프의 유작이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작가와 독자, 애디와 루이스도 안다. 이렇게 새롭게 선택한 하루하루에 충실하면서 단순하게 사는 것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지나온 삶과 연결된 관계들, 그것에서 오는 고정관념까지 과감히 뿌리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그렇게 할 만큼 매정하지도 못하다. 딸과 아들의 노골적인 반감과 몰이해, 아들의 가정과 어린 손자를 지켜야 한다는 보편적이고 당연한 상황 앞에서 그들은 70대 연인이 아니라, 여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그래서 ‘그러던 어느 봄날’에 시작한 애디와 루이스의 도전은 가을이 오면서 끝난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 돌아가지 않는 지금 있는 자리가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순간부터 ‘밤에 그들의 영혼’은 다시 쓸쓸해진다.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이 찾아온 것이다.

애디의 말처럼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런 용기와 선택이 없었다고 그 나이에 이런 감정이 아직 남아있으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상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와 연극이 있어서가 아니다. 영혼은 젊으나 늙으나 어두운 밤이면 방황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찬바람이 부는 가을의 어느 날 밤, 애디는 루이스에게 전화를 한다. 폰 섹스가 아니라, 대화를 위해.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라고 시작하는 날씨 얘기라도 좋다.

시간과 인물도 제한적이고, 별난 장치나 공간도 없고, 대화로 이어지는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은 영화로 만들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리테쉬 바트라 감독의 영화도 소설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소설보다는 조금 더 로맨스의 냄새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세가 넘은 노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가 주인공으로 나오니 자연스러워야 할 텐데 어색하다. 왜, 노년의 이야기는 눈으로 보는 영화보다 글로 읽는 소설이 더 편할까. 60대가 되어도 아직은 노년이 아니라는 착각 때문일까. 아니면 자연의 생존법칙으로 보면 그보다 더 허허하고 슬픈 것도 없는 늙음을 미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내기치 않아서일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보다는 소설의 긴 서사의 시간성과 언어가 가진 상상력과 온도가 성찰을 이끌어내면서 감정을 너그럽고 깊게 한다. 반면에 영화는 조급하다. 밤에 조용히 나누어야 할 대화가 시도 때도 없이 대사로 쉼 없이 이어지고 남자의 외도와 아내 이야기, 여자의 딸을 잃는 비극과 남편의 이야기를 서두른다. 그것이 정작 중요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자연스럽고 편안한 감정이입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설에서 과거의 단순한 서술을 생생한 재연으로 되살려 현재의 설득력을 높이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시도조차 없어 공감이 아닌 보여주는 데에만 머물러 버리게 했다.

이해는 된다. 영화는 소설처럼 마냥 시간을 늘릴 수 없고, 아무리 베테랑 배우의 연기라 해도 글이 가진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가 극장이 아닌 OTT(넷플릭스)로 개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영화는 흥행성이 약해 많은 제작비를 쓰지 못한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이 서럽고, 늙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힘들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아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