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③인생을 치열하게 산 ‘순수고독, 순수허무’의 시인

- 나의 아버지 조병화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③인생을 치열하게 산 ‘순수고독, 순수허무’의 시인

- 나의 아버지 조병화

조병화(1921~2003) : 시인, 경기 안성 출생. 경희대·인하대 교수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 역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사랑이 가기전에』 『밤의 이야기』 『어머니』 『남남』 등
삶과 죽음, 인생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독자와 솔직한 대화를 이루어 옴.

 

아버지 조병화 시인

물리·화학을 전공하신 아버님이 어떻게 해서 시를 쓰시게 됐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다. 아버님은 경성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수학하시던 중 3학년을 마치시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해방을 맞으셨다. 해방되던 해 9월에 결혼하시고는 모교인 경성사범학교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셨는데 실험실도 없고 본인의 연구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결과물들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월급쟁이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과 당시 무질서한 사회질서에 좌절을 느끼시어 자신의 처지를 글로 옮겨 쓰시기 시작하셨다. 아버님은 경성사범학교 2학년 때 인생을 많이 살기 위해 육체적으로는 많은 여행을 하고 정신적으로는 많은 책을 읽자고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공부에 지장이 있어 철학적인 교훈을 주는 시집들을 많이 읽으셨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때에 읽었던 시집들이 바탕이 되어 저절로 시가 나와 어느 정도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누구한테 시 작법을 배우신 것도 없이 독창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1951년 여름 부산 광복동에서 박인환 시인이 ‘후반기(後半期)’ 동인지를 같이 하자고 하셨지만 아버님은 ‘시는 혼자 쓰는 것이다’하며 거절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쓰신 시들이 김기림 시인에 알려져 장만영 시인이 운영하시던 출판사 산호장에서 『버리고 싶은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1949년에 출간을 하게 되었고 시인의 길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90년 5월 2일 아버지의 고희기념 전람회에서 어머니와 함께

편운재 앞에 선 아버지   

 

서울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신 후에는 김원규 교장의 배려로 물리에서 대수로 그리고 국어작문으로 과목을 바꾸어 가르치셨다. 서울고등학교 초창기에는 인천에서 통근을 하셨는데 기차시간이 부정확하고 통근시간이 오래 걸려 김원규 교장에게 부탁을 하여 학교 도서관 2층에서 한 1년간을 지내셨다. 이 기간에 문학책도 많이 읽으시고 매일 저녁 명동에 나가 많은 예술인들과 어울리시면서 시인의 길로 나서게 되셨다. 이 명동 시절을 아버님은 다양한 예술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개방종합대학’ 시절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이때부터는 아버님은 거의 매일 통금이 있던 밤 12시까지 친구들과 술로 밤을 지내셨다. 그래도 집에 오셔서는 다음 날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다.

아버님은 결혼 초 한 3년간은 본인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하시면서도 가정에 충실하셨다. 월급도 100% 집에 갖다주시고 학교에서 퇴근하시면 일찍 집에 들어오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시인이 되신 후로는 많은 예술인들과 교류하면서 어머님과의 다툼이 자주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쯤 돼서 처음으로 심한 다툼이 있었다. 아버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김기림(金起林) 선생이 김병욱(金秉旭) 시인을 나에게 보내며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대접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로 집으로 가 집사람 보고 얼마의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요구한 돈 절반을 내주었습니다. 나는 몹시 기분이 상해서 돈을 다시 돌려주고 학교 수위에게서 돈을 꾸어서 저녁을 치르고 나머지 돈을 김 시인에게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그 이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월급을 3:7로 나누어 3을 내가 쓰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님은 프라이드가 강하셔서 산부인과 의사이신 어머님에게 지지 않기 위해 특히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열심히 시를 쓰시면서 모자라는 돈을 보충하셨다. 이 내용을 모르고 아버님이 어머님의 후원으로 넉넉히 살고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버님은 그것을 굴욕적인 모욕으로 느끼셨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모욕을 주고 다시는 만나지도 않으셨다. 김수영 시인이 늘 “병화, 너는 네 마누라가 의사라서 맥주를 마시고 나는 돈이 없어 쐬주를 마신다”고 비아냥하는 것을 참다가 한번은 맥주를 김수영 시인의 얼굴에 뿌리면서 “그렇게 부러우면, 네가 데리고 살아라” 하고 자리를 옮기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산부인과 의사를 하셨다. 그래서 어머님도 아버님 못지않게 프라이드가 강하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머님이 진명여자고등학교를 다니실 때 지리 선생님이 어머님의 호를 시영(詩影)이라고 지어주셨다는 거다. 결혼할 당시 아버님은 물리·화학을 전공하신 과학도이셨는데 어떻게 시의 그림자라는 호를 받게 되셨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정을 잘 꾸려 가시려는 어머님과 밖에서 예술인들하고 시간을 보내시는 아버님과는 자주 다툼이 있었고, 이러한 갈등이 아버님을 더욱더 고독하게 만들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시게 만든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님은 할머님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살아오셨다. 할머님의 말씀 ‘살은 죽으면 썩는다’를 늘 생각하시며 시간을 아껴가며 열심히 살아오셨다. 시를 쓰기 시작하셨을 때는 한국말이 서툴러 늘 사전을 옆에 놓고 시를 쓰셨고 사람들을 만날 때는 늘 시간을 쪼개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만 만나셨다. 그래서 아버님은 초창기에는 문인들과도 교류가 별로 없었고 문단에는 더구나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다가 1974년에 시인협회상을 받으시고는 시인들이 본인을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시어 시인들과 교류를 넓히기 시작하셨다. 아버님은 원래 문단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버님이 시인협회장, 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 회장 등 여러 단체장을 맡으셨지만 이들은 모두 추대형식으로 선출되신 것이다. 아버님은 성격이 정직하고 깨끗하여 여러 단체장을 맡으셨지만 별로 잡음이 없었다.

아버님은 모든 일을 본인이 책임지시고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1962년에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는 돈이 생기는 대로 고향 난실리에 땅을 사서 모아 지금의 약 3,000평 규모의 편운동산을 만드셨다. 이 편운동산에는 편운재, 청와헌, 조병화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다. 본인이 용돈을 아껴가며 원고료와 그림 판 돈을 모아 인사동 대학로 등에서 구입하신 유명 조각가의 여러 작품들도 곳곳에 세워놓아 아버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살아계시는 동안에 미리 마련하셨다. 아버님은 늘 ‘인생은 순수고독, 순수허무’라고 말씀하셨지만 인생을 처절하게 열심히 사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많은 흔적을 남기신 것을 보면 아버님은 이 ‘순수고독, 순수허무’를 극복하시지 않으셨나 생각한다.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1947년생